정보마당/루트정보

인수봉 의대길

팬더마당 2010. 5. 12. 20:25

'노란 봄'이 팔랑팔랑 날아든다

글·사진 손재식 사진작가 (sohnbal@orgio.net)



 ◇ 의대길의 힘든 고빗사위, 둘째 마디의 쌍크랙을 침착하게 오르고 있는 장우영·이의준이 첫 마디 종료지점에서 이현수를 확보하고 있다.


배낭을 메고 한밤에 산길을 걸어본 사람은 안다.
작은 랜턴 불빛이 주는 위안과 함께 오르는 사람의 소중함을.
그것은 일상에선 느끼지 못하던 일이다. 산에서 갖는 생각과 느낌이 특별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늘 어디론가 떠날 꿈을 꾸기 마련이다. 굶주림과 갈증 속에서도 즐거움과 희열을 찾아냈던 일들을 기억하며.
1971년 8월 하순. 한 무리의 산꾼들이 북한산 인수 산장으로 들어섰다.
이들은 주말이면 단골로 드나들며 산장을 점령하던 쟁이들이 아니었다. 관리인이었던 이경구 씨는 방학도 끝나가는 평일에 산에 나타난 이들을 등록금 ‘삥땅치고’ 산장으로 놀러온 학생쯤으로 보았다. 그 것도 서울의대생을 사칭하며.
그러나 그 생각은 며칠 가지 않아 바뀌고 만다. 그들은 바로 인수봉 의대길 개척의 주역들로 당시 서울의대 본과 4학년인 이남규·오규철·예과 2년 생인 최태식·이병달·허준평 그리고 1년 생인 김성환 등이었다. 오규철과 이남규 씨는 졸업시험을 앞 둔 때지만 후배들과 함께 남은 여름을 후회 없이 바위에서 놀자고 의기 투합 했다. 학교를 졸업하면 의사라는 직분으로 산에 가는 것이 쉽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경구 씨는 오규철을 허구한 날 옥상에서 죽치며 춤추고 놀던 ‘썩은 오씨’라고 서슴없이 말하며 그 때의 대원들을 아직도 잊지 않는다. 귀바위 슬랩이라고 부르던 이 루트를 이경구 씨는 서울의대생들이 낸 길이라고 의대길로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작 서울의대 산악부는 길을 낸 후 개척보고서에조차 이름을 짓지 않았다. 자기가 한 일을 스스로 평가하거나 이름 짓는 것이 내키지 않았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산꾼들은 자연스럽게 의대길이라고 불러주기 시작했고 그렇게 굳어져버렸다.
원 없이 등반을 하고 싶어 했던 어줍잖은 차림의 그 학생들은 지금 무엇을 할까. 예상은 어렵지 않다.
그들은 각기 의사가 되었거나 병원을 운영하는 안정된 사회인이 되었다. 그 중에 허준평 씨는 군인의 길을 걸어서 이른바 장군이 된 사람이다. 그것도 별을 하나도 아닌 두 개씩이나 단 육군 의무감이다.
그러나 그는 산에서만큼은 선배들 사이에 끼어 있는 조용한 후배일 뿐이다. 허준평은 의대길의 둘째 마디 ‘앙카바짝’을 소리도 없이 구렁이 담 넘어가듯 오르던 타고난 바위꾼이라고 오규철 씨는 30년이 지난 지금도 입에서 떼어놓지 못한다. 의대길 개척 후 선등으로 시등을 했던 그가 결국 큰바위 얼굴이 된 것은 아닐까.
오규철 씨를 만나러 가는 날, 그는 마라톤 할 때 신을 운동화를 찾는 중이었다. 산을 떠난 후 그가 잡은 새로운 도전의 대상은 마라톤과 산악자전거와 철인경기 등 결코 만만한 장르가 아니다. 마라톤에서 그가 세운 기록은 풀 코스 완주에 3시간 40분. 지금까지 초등반 기록을 가진 선구자들은 한결같이 새로운 도전의 대상을 끊임없이 찾고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오규철 씨는 물론 이병달 씨 역시 마라톤 풀 코스와 180km의 사이클링, 3.8km의 수영을 13시간에 주파하여 그도 이미 철인이 되어 있다.

개척자 정신을 이어받은 ‘전국구’

그들의 까마득한 후배들과 의대길을 찾아갔다.
50년 역사에 이르는 서울의대산악회의 분위기는 옛날과 달라진 게 없는 듯하다. 함께 한 재학생들의 차림에서 의대길을 열었던 선배들의 분위기를 어림짐작한다. 세련되지 않은 그렇다고 노련하지도 못한 이들의 품새는 오히려 학생다워서 보기가 편하다. 그들이 나누는 대화 속에는 산과 삶이 뒤죽박죽 되지 않을 만큼의 이성도 엿보인다.
오늘의 리더는 비교적 등반 경험이 많은 부산 출신 이현수, 그리고 학년은 같지만 나이가 많은 장우영, 대구 출신 이수영, 익산 출신 김동현, ‘어깨동무’ 글씨가 새겨진 배낭을 메고 소풍가듯 동참한 서울내기 이의준. 아직 4학년이 되지 않은 ‘전국구’ 5명이 모였고 모두 안경을 썼다. 산악부의 규율쯤은 없어도 좋고 있어도 관계없는 듯 스스럼없지만 2,3학년생들은 과연 초행인 의대길을 잘 해낼지 궁금했다.
“각자 산행비 내고, 모두들 학생증 걷어서 600원 아껴야지.”
돈을 벌지 않긴 피차 마찬가지지만 이현수는 재학생들을 이끌어야 한다는 의무감이 있는 리더다.
등반에선 모두 그의 결정을 기다린다. 대학산악부답게 헬멧을 든든히 쓰고 먼저 오르는 것도 그의 몫이다. 얼음이 붙은 취나드 B코스를 우회하여 슬랩을 오른다. 그가 오르자 뒤이어 두 번째로 동현이 따라 붙는다.
“동현아 매듭 풀지 말고 후등자 빌레이 보는 법을 가르쳐줘!”
“손 선생님은 제 세컨을 봐주실 수 있겠어요?”
경험이 적은 후배들을 걱정하는 이현수의 주문이다. 좌향 크랙을 지나면 한 스텝의 슬랩이 까다롭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리라.
이현수의 확보를 본 후 사진을 찍기 위해서 영길 쪽으로 가야하는데 자꾸 망설여진다. 그가 심리적으로 부담을 안고 있는 것이 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둘째 마디의 쌍크랙은 의대길의 고빗사위. 아직 경험 없는 신참들이 붙기엔 쉽지 않은 곳이다. 아니나 다를까. 쌍크랙에서 적지 않은 시간을 보낸 의준에게 현수는 셋째 마디에서 하강을 권유한다. 결국 의준· 동현·수영은 도중 하강하고 넷째 마디를 장우영·이현수와 함께 셋이 오른다.
‘죽어도 함께, 살아도 함께’라는 말은 이제 등반에서도 빛이 바래 가는 느낌이다.
대신 언제부터인가 그 공백을 메우듯 ‘자유롭고 즐겁게’라는 말이 윤리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결코 어느 것이 먼저라고 따질 수 없는 일이다.

 ◇ 쌍크랙의 크럭스부분을 지나는 이현수의 등반 모습. 과거에는 고정하켄 세 개를 설치하며 올랐으나 지금은 프렌드를 설치하고 확보물에 의지하지 않고 오른다.


함께 웃고 더불어 오른다

앞장 선 이현수의 입에선 기억나는 등반의 일화가 독백처럼 흘러나온다.
언젠가 산악회 선배와 검악길을 올랐을 때 실력이 안 되는 후배가 초 스피드로 올라온 것이 하도 신기해서 모두들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후배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대변이 마려웠단다.
힘겹게 올라온 그곳에 화장실이 없는 것은 당연한 일. 그는 빨리 내려가기 위해서 정신없이 올라왔을 뿐이다. 결국 대변 때문에 팀 전체가 그곳에서 하강을 하고 말았다. 며칠을 굶어가며 험난한 벽에 붙어서 싸울 수는 있어도 밀고 내려오는 대변을 참아 내는 일은 용기와 끈기로 할 수 없다. 자연 앞에서 인간은 나약하지만 대변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하다고 말할 수 있다. 오늘은 선배들이 검악길에서 취했던 일사불란한 팀워크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분수에 맞게 느릿느릿 오를 뿐이다.
둘째 마디와 셋째 마디를 넘는데 시간을 끌다보니 짧은 햇빛마저 벽 너머로 사라진다. 드디어 발과 정강이 사이가 시리다. 의대길은 햇빛이 있을 때 넷째 마디를 끝내는 것이 좋다. 그렇지 않으면 요철이 드러나지 않아서 고도감이 더 느껴지기 때문이다. 인수봉을 옛날 사람들이 보았던 것처럼 독이나 손잡이가 달린 그릇에 비유하자면 의대길은 돌출된 손잡이에 해당된다. 따라서 해가 사각지역을 비출 때 의대길의 위용은 한층 더 실감난다.
개척자들은 바로 그런 돌출된 바위를 면밀히 관찰해왔다. 20여일 간 망원경으로 전코스를 정찰하고 10개 루트를 하강하면서 근접촬영까지 하는 열성도 아끼지 않았다. 그 결과 20m 간격으로 가로놓인 밴드가 둘러쳐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이 바로 등반의 열쇠였던 것이다. 그런 연후에 시도된 의대길은 짧은 시간동안 집중도를 높인 것이 주효했다.
1971년 8월 26일 이남규 씨와 이병달 씨는 인수 A코스를 올라 귀바위 뒤로 테라스에 오른 다음 나무에 자일을 걸고 확보 한 후에 35m를 하강하여 그곳에서 슬랩 등반에 성공했다. 그리고 의대길 등반의 가능성을 확인했다. 그리하여 8월 30일까지 이남규·오규철·이병달·김성환 등이 주축으로 개척을 마무리하고, 9월 첫 주인 5일과 둘째 주엔 최태식·정흠·김주이 등의 대원들이 가세하여 시험등반을 마침으로써 의대길은 비로소 탄생을 보았다.
대개의 대학산악부가 그렇지만 서울의대산악회는 조금 다른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 이들은 합리주의에 입각한 의학도답게 매우 수평적이다.
의대길 등반이 끝나고 발간한 개척보고서에는 대장의 이름이 없다. 당시 산악부장 이름도 명기하지 않았다. 다만 졸업을 앞둔 이남규 ·오규철·최태식 등의 선배들이 리더였고, 재학생인 이병달·허준평·김성환 등은 촬영과 기록을 담당한 대원이었을 뿐이다.
그러한 분위기로 서울의대산악회는 1956년 4월 첫 총회를 개최한 후 오늘날까지 200명에 달하는 ‘점 조직’이 만들어졌다. 조중삼 교수가 초대 회장을 지냈고 부회장에 심상황 교수, 그 산악부장엔 문일영 씨 외에 이민재·고재경·박찬웅 등 한국산악회의 오랜 주축멤버들이 서울의대산악회 출신이다.
1958년의 기록엔 서울공대생이었던 박승준·서립규·남정현·마석일· 선우문옥 등 현재 산악계 유명인사가 된 사람들과 지리산 하계등반을 떠난 기록도 눈에 띈다.
2학년 학생들을 내려보내고 이현수·장우영과 함께 다섯째 마디를 마친다. 이곳은 15m쯤 되는 쉬운 슬랩이지만 중간에 확보볼트 하나쯤은 필요한 곳이다. 취나드 B코스의 크랙등반이 끝나면 만나게 되는 테라스에 오른 이현수의 에코 소리가 퍼져나간다.
“어허이!”
사투리가 섞인 에코 소리가 마치 의대의 ‘의’자가 변해서 된 말로 들린다. 피톤에 확보하고 작은 바위턱에 올라서서 왼쪽 끝으로 올라붙는 여섯째 마디의 슬랩은 처음 출발이 조금 과감해야 한다. 만일 미끄러지면 몸이 허공으로 뜰지도 모를 일이어서 망설임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애당초 의대길은 다섯째 마디까지로 만들어졌다. 마지막 슬랩은 그 이후에 연결하였으며 4개의 볼트로 이어진다. 이 슬랩을 지나 정상에 서면 의대길은 인수봉에서도 독립된 봉우리처럼 느껴진다.
바람이 세차게 부는 오늘, 정상에서 어깨동무한 이현수와 장우영. 두 사람은 먼 훗날 오늘의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미소 지을지도 모르겠다. 그 권리는 언제나 정상에 선 사람이 차지한다. 둘은 웃으며 합의한다.
먼저 내려간 후배들이 꼭대기에 무엇이 있더냐고 묻는다면, 찰떡 파이와 자동판매기에서 커피를 뽑아 먹었다고, 사실여부는 직접 가서 확인하길 바란다고...

 ◇ 인수봉 의대길


등 반 길 잡 이

의대길은 1971년 8월 하순에서 9월 중순에 걸쳐 서울대학교 의대산악부에서 개척한 길이다.
전체 루트는 총 여섯 마디로 되어있으며 등반길이는 약 130m에 달한다. 최고 난이도는 마지막 마디의 슬랩이 5.10b로 매겨져 있으며 장비는 프렌드 1·2·3·5호 등이 필요하다. 등반의 시작은 일명 오아시스라고 부르는 대슬랩의 중단 잡목지대의 오른 쪽에서 시작한다. 여섯째 마디에서 등반을 끝내면 올랐던 루트로 하강을 할 수 있으며 기존 A코스 쪽으로 한 번의 하강을 한 후에 인수봉 정상에 오를 수도 있다.

첫 마디(25m)_ 출발 지점에 잇는 소나무 오른 쪽의 밴드로 이동한 후 왼쪽의 볼트를 통과한 후에 다시 왼쪽의 그립홀드를 이용해서 슬랩을 오른다.
둘째 마디(20m)_ 두 개의 크랙이 아래위로 나 있는 아래의 크랙을 잼이나 레이백으로 5m쯤 오른 후 오른쪽 크랙으로 진입하여 재밍을 하며 테라스로 오른다.
셋째 마디(12m)_ 짧은 슬랩과 연속된 5개의 볼트를 지나 고정 피톤이 잇는 곳까지 오른다.
넷째 마디(30m)_ 경사 70。가까운 슬랩이지만 바위면의 요철이 잘 발달된 슬램을 4개의 볼트를 지나 왼쪽으로 이어지는 밴드형 홀드를 따라 오른다. 원형 피톤과 볼트에서 확보한다.
다섯째 마디(20m)_ 어렵지 않은 슬랩이지만 마디 중간에 볼트가 설치되어 있지 않으므로 신중해야 한다. 슬랩이 끝나면 취나드 B코스의 크랙이 끝나는 넓고 평평한 테라스다.
여섯째 마디(20m)_ 하강용 피톤에 확보한 후 왼쪽 끝으로 이어지는 작은 바위턱에 발을 딛고 서서 슬랩에 올라선다. 그 후 4개의 볼트를 지나면 등반이 끝난다. 여기서 갈라진 바위를 건너뛰면 귀바위 정상이다.
이곳에서 인수 A코스 넷째 마디 종료지점으로 하강하여 인수봉 정상으로 갈 수도 있고, 쌍볼트에 줄을 걸고 오아시스로 하강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