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둔산 양파길 a
껍질을 벗길수록 새로운 모습을 보이는 양파 같은 리지가 대둔산에 개척됐다. 양파B 리지로 명명된 이 코스는 2007년 11월 중순 대전 클라이머산장 대표 홍현씨와 대전락클라이밍등산학교 17기 회원들이 길을 낸 중급자 코스다. 페이스, 크랙, 슬랩 등 다양한 형태의 바위로 이루어진 이 길은 수직 페이스의 짜릿한 손맛과 함께 대둔산 절경을 만끽할 수 있다.
11월 초 이기열(대전산악조난구조대)씨로부터 새로운 리지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설레는 마음으로 대전을 향해 차를 몰았다.
회색 바위와 독야청청한 바위틈에 자란 노송들이 반기는 대둔산에 도착하자 코끝을 스치는 바람이 차가웠다. 만산홍엽이 불과 몇 주 전이었는데 케이블카 승강장 앞 단풍나무의 퇴색한 붉은빛은 벌써 겨울을 알리고 있었다.
“밥 많이 먹고 올라가세요. 오늘 등반이 만만치 않습니다.”
등반을 시작하기도 전에 겁을 주는 대둔산 산악구조대 이왕영씨다. 그가 준비한 된장찌개로 아침을 해결하고 출발 준비를 했다.
오늘 등반은 대전락클라이밍 등산학교 17기 출신인 김경재, 이종현, 박순천, 유수연씨와 대전락클라이밍센터의 문승범씨와 한다. 대둔산에서 바위를 시작한 이들의 관심은 온통 양파B 리지 껍질 벗기기(?)에 쏠려있었다.
이른 아침이었는데도 케이블카는 등산객들로 왁자지껄한 장바닥이었다. 약 1킬로미터 거리를 5분만에 오르는 케이블카에서 내려다본 대둔산의 늦가을은 스산한 모습이었다.
“개척 작업 대부분을 청소와 낙석제거에 매달려야 했을 정도로 힘들었습니다.”
김경재씨로부터 개척 당시의 이야기를 듣는 사이 케이블카는 어느새 금강문 아래에 도착해 50명의 승객을 쏟아냈다. 승강장 근처에 있는 동심바위를 지나 금강계곡쪽으로 5분 정도 내려서 첫번째 매점에 닿았다. 늦가을 산행의 정취를 즐기려는 등산객들이 간간이 보였다. 케이블카를 타지 않고 금강계곡에서 이곳 매점 입구까지는 30분 정도 걸린다.
매점 축대를 따라 오솔길로 접어들었다. 낙엽이 잔뜩 뒤덮인 길은 가파르고 여간 미끄러운 것이 아니었다. 좁아진 계곡을 따라 15분쯤 오르자 양파A 리지와 양파B 리지 갈림길이 나왔다. 이곳에서 오른쪽 능선 쪽으로 10분을 더 오르자 하얀색 고정자일이 설치된 양파B길 초입이었다.
“저 위로 올라가는 거예요? 경사가 너무 급하네요.”
오늘 처음 양파B 리지를 등반하는 박순천씨는 가파른 바위벽을 보고 벌써 걱정이었다.
“어렵지 않으니 차근차근 오르면 된다”고 등반을 책임진 김경재씨가 안심시킨다.
첫피치는 크랙과 페이스가 혼합된 17미터로 난이도는 5.9급 정도였다. 등반을 시작하자 문씨가 능숙한 솜씨로 크랙과 페이스를 올라 등반을 마쳤다. 선등자의 여유 있는 등반에 자신감을 얻었는지 유수연씨도 긴 팔다리를 이용해 크럭스인 두번째 볼트를 성큼 넘어섰다.
첫피치 등반을 마치자 주위 조망이 좋은 넓은 테라스에 도착했다. 하지만 머리 위로 쏟아질듯 서 있는 5.11b급 오버행 크랙은 주위 풍광을 둘러볼 수 있는 여유를 주지 않았다. 신경은 온통 추락 없이 크랙을 어떻게 넘어설지에 쏠리기 시작했다.
“세번째 볼트에 퀵드로 걸기가 어렵습니다. 밸런스를 잘 잡아야 합니다.”
문씨의 설명을 들은 후 나는 장비를 챙겨 오버행 크랙을 오르기 시작했다. 손가락 두 마디가 걸리는 하단부는 좌향 크랙을 따라 무난히 오를 수 있었다. 하지만 두번째 볼트를 지나자 상황은 돌변했다. 벽의 각도가 오버행으로 변한 이유도 있었지만 세번째 볼트까지 등반 거리가 너무 길었다. 만약 퀵드로를 걸다가 떨어지면 바닥을 칠 것이 분명했다.
공포가 밀려오기 시작한 마음은 크랙을 잡은 왼손의 근육을 급속히 경직시켰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밸런스도 계속 깨져 중간에서 오도 가도 못하게 되었다. 오르려는 마음이 사라지는 순간 갑자기 발이 빠지며 몸이 허공을 갈랐다.
“왼쪽 발 홀드를 쓰면 균형이 잡혀요.”
이곳을 등반한 경험이 있는 문승범씨가 해법을 제시했다. 그의 말대로 오른손으로 크랙을 잡고 왼발을 벌려 홀드를 딛자 체중이 분산되며 균형이 잡혔다. 곧바로 독수리가 먹이를 낚아채듯 튕겨 일어나 오른쪽 머리 위 큰 턱을 잡았다. 그제야 안도의 한숨이 터지며 머릿속이 투명해질 만큼 맑은 하늘을 향해 솟아있는 암봉들이 눈에 들어왔다. 가슴까지 시원해지는 순간이었다.
세번째 피치는 두 곳으로 오를 수 있었다. 왼쪽 크랙으로 오르면 5.10b급이고 오른쪽 크랙은 5.9급 정도였다.
이종현, 박순천씨가 오른쪽 크랙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이들은 늦은 나이인 40대에 등반을 시작했지만 열정만큼은 젊은 클라이머 못지않은 억척 주부 등반가들이었다.
몇 번 다리를 높게 올리고 또 몇 번인가는 수직의 바위벽에 막혀 끙끙거리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힘차게 올라 “완료”를 외쳤다.
피치 종료지점에서 5미터를 더 오르자 20명은 족히 앉아 쉴 수 있는 마당바위가 나타났다. 아줌마 3인방 이종현, 박순천, 유수연씨가 정성들여 싸온 도시락을 꺼내자 순식간에 생일상 부럽지 않은 진수성찬이 차려졌다.
“이것도 좀 드세요. 아침에 볶음밥 만들기가 얼마나 어려운데 김밥만 먹어요?”
서로에게 음식을 권하는 이들의 정겨운 모습이 가족 같아 보였다.
“올봄 등산학교에서 처음 만난 후부터 마음이 맞아 가족처럼 지내고 있습니다. 가족이 별건가요. 아침에 눈곱 붙은 얼굴을 보고도 이상하지 않으면 가족이지요?”
이씨의 말대로 등산학교에서 인연을 맺어 서로의 허물을 덮어줄 수 있는 사이로 발전한 대전락클라이밍 등산학교 17기들의 자일의 정이 가을 하늘처럼 맑아 보였다.
4피치 역시 좌우 측 크랙으로 모두 오를 수 있었다. 오른쪽 크랙은 5.10b급으로 왼쪽에 있는 5.10a급 크랙보다 조금 더 어려웠다. 김경재씨가 오른쪽 크랙을 따라 등반에 나섰다. 오른손으로 크랙을 잡고 몸을 최대한 왼쪽으로 이동해 간신히 균형을 잡은 김씨가 머리 위 홀드를 이용해 고빗사위를 넘어섰다.
5피치는 수직 20미터 길이로 칸테를 따라 등반하는 코스다. 벽의 모서리를 따라 시작된 문승범씨의 등반은 푸른 가을 하늘과 아름답게 조화를 이뤘다. 마치 바위를 타고 하늘로 오르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간헐적으로 나타나는 수직의 바위벽을 피해 완경사를 따라 등반해야하는 6피치는 쉬운 5.8급의 크랙과 페이스였다. 하루 종일 등반하느라 지칠 만도 한데 이들의 등반 열정은 끝이 없어 보였다. 등반시간을 줄이기 위해 모두 연등으로 이곳을 넘어서자 이제 마지막 봉우리가 손에 잡힐 듯 했다.
“마지막 피치는 제가 갈께요.”
종일 라스트로 뒤치다꺼리를 했던 유수연씨가 양파길의 마지막 껍질인 7피치 등반에 나섰다. 쉽게 크랙을 넘어선 그녀가 힘차게 “완료” 소리와 함께 자일을 고정하자 나머지 일행들은 주마를 이용해 쉽게 정상에 섰다.
리지 종착점에서 바라본 마천대 정상에 있는 하얀 개척탑 주변으로는 울긋불긋한 옷차림의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북동쪽으로는 서대산이 우뚝했고, 남쪽 백 리쯤으로는 한 달 전이나 다름없이 덕유산이 후덕한 덩치를 뽐내며 있었다.
“세상살이가 등반 같아요. 노력 없이 쉽게 되는 게 없으니까요.”
유씨의 등반철학을 들으며 등산로를 따라 20분 가량 내려오니 케이블카 승강장이었다. 걸어서 15분이면 오를 수 있는 곳을 종일 온몸을 바위에 부대끼며 올랐다. 하지만 모두의 입가에 웃음이 묻어나는 것은 껍질을 까는 수고 없이 양파의 속살을 볼 수가 없다는 진리를 오늘 등반을 통해 새삼 느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