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도 시티오브해벽
여름철 클라이머라면 한 번쯤은 꿈꾸어 보았을 해벽등반! 하지만 중부권 클라이머들이 이 등반 한 번 하려면 소매물도, 태종대, 통영, 관매도 등지로 먼 길을 나서야 했다. 길만 먼 것이 아니라 주차장이 된 고속도로, 바가지 물가, 배멀미 등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해벽 한 번 만져보기도 전에 파김치가 되는 것이 다반사였다. 하지만 올여름부터는 서울 출발 1시간이면 해벽등반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눈치 빠른 이라면 “아! 1시간. 그럼 서해구나!”할 것이다. 맞다! 북파공작원을 소재로 한 영화 ‘실미도’가 코앞인 인천광역시 무의도의 해식애(海蝕崖)에 길이 난 것이다. 개척의 주인공은 실내인공암벽장 애스트로맨 대표 윤길수(52세)씨와 회원 이종태(43세)씨. 올해 2월 암장 회원인 김미영씨와 호룡곡산을 찾은 윤씨는 하산길에 하나개해수욕장 왼쪽, 해안선을 따라 형성된 절벽을 보고 탄성을 질렀다. 오버행진 화강암벽, 접근의 편리성, 양호한 야영장과 식수 등 암장이 갖추어야 할 조건과 딱 맞아떨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는 단박에 이씨와 함께 개척에 나섰다. 3개월 동안 한 주도 거르지 않고 이곳을 찾은 이들은 현재까지 총 30개 루트를 개척, 하나개암장으로 명명했다. 한적한 인천공항고속도로를 30분 정도 달리자 공항 2킬로미터 전, 우측으로 ‘무의도’ 표지판이 나타났다. 제방도로를 따라 3킬로미터를 달려 잠진도 선착장에 도착했다. 배에 차를 싣자 출발을 알리는 뱃고동 소리가 힘찼다. 뱃머리를 돌린지 5분, 하선 안내방송을 들으며 도착한 선착장 앞에는 소담한 어촌 마을이 있었다. ‘너른 갯벌’을 뜻하는 하나개해수욕장으로 차를 몰았다. 울긋불긋 봄꽃 피어난 4월의 섬은 아름다웠다. 해안도로를 따라 10분, 해수욕장 주차장에 도착했다. “썰물 때면 갯벌로 길이 나기 때문에 암장까지 5분 정도면 도착할 수 있는데 지금은 물이 차있어 호룡곡산 등산로로 가야 합니다.” 윤길수씨의 설명을 들으며 소나무향 그윽한 길을 따라 10분 정도 운행하자 등산로 옆으로 까마득한 절벽이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저곳 인가요.” “저기도 있고 또 저쪽 너머에도 암장이 있습니다. 해안선을 따라 여섯 곳의 암장이 있습니다.” 선경(仙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서해의 밀물과 썰물이 억 겹의 시간 동안 만들어 놓은 바위였다. 등반을 시작도 하기 전에 맑은 바닷물에 발을 담그고픈 마음이 굴뚝같았다. 주객이 전도된 마음을 가라앉히고 급경사 지대를 내려서자 예쁜 몽돌해변 위로 화강암 직벽이 나타났다. “여기가 제1구역, 애스트로맨 암장입니다. 난이도는 5.9~5.11이며 총 23개의 루트가 있습니다. 이곳부터 등반합시다.” 윤씨가 가리키는 벽은 높이 15미터, 폭 50미터의 수직절벽이었다. 암질이 다르다는 것만 빼면 해식절벽으로 유명한 프랑스 북부 알바트르 해안(Cote d’Albatre)에 있는 다몽 절벽과 닮아 있었다. 장비를 차는 사이에 물은 빠른 속도로 빠지고 있었다. 몽돌밭 뒤로 너른 개흙이 드러날 때쯤 윤씨가 5.9급인 ‘짱구박사’ 등반을 시작했다. 보기에는 막막한 직벽 같은 루트였지만 숨은 홀드들이 곳곳에 있었다. 세번째 볼트를 지난 윤씨가 발을 벌려 스테밍 자세를 취한 후 머리 위에 있는 큼지막한 홀드를 잡고 일어서자 쌍볼트가 반겼다. “이제 몸 풀었으니 본격적인 등반 해볼까요?” 그가 다시 붙은 곳은 100도 오버행의 5.10b ‘왕좁쌀’. 이 루트는 작고 흐르는 홀드로 이루어진 초반부가 고빗사위였다. 등반을 시작한 윤씨의 몸놀림이 가벼워 보였다. 지난 30년간 자유등반에 대한 열정과 노력이 배어나는 동작은 깔끔하고 스마트했다. 긴 팔다리로 성큼성큼 등반, 상단부에 진입한 그는 주민욱 기자의 사진 촬영에 응하면서 여유 있게 등반을 마쳤다. 물이 빠지며 맨몸뚱이를 내보인 갯벌은 광활했다. 몽돌 틈바구니와 갯바위에는 굴이 지천이었다. “이거 먹어도 돼요?” “아무 이상 없습니다. 이곳이 청정지역이잖아요.” 이종태씨의 말이 끝나자마자 굴을 캐기 시작했다. 등반도 하고 굴도 먹고 일거양득, 꿩 먹고 알 먹고였다. “이제 제2구역인 고둥바위로 등반하러 갑시다.” 제1구역에서 100미터 정도 떨어진 제2구역은 각도와 난이도가 만만치 않아 보였다. 물이 차면 딥워터솔로(deep water solo) 등반을 하는 것 같은 이국적 분위기를 자아낸다고 윤씨가 귀띔했다. 이준철씨의 확보로 윤길수씨가 다시 등반에 나섰다. 등반루트는 ‘피뿔’, 난이도는 5.10c였다. 두번째 볼트를 지날 때까지 윤씨는 애를 먹었다. 제1구역 루트들보다 홀드가 좋아 보였지만 막상 붙으면 흐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빠른 속도로 밸런스를 잡아갔다. 세번째 볼트부터는 손가락 한 마디 걸릴 정도로 홀드가 작아졌지만 벽의 각도가 약해져서 수월하게 등반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초반부가 크럭스인 루트였다. 등반을 마치고 잠시 휴식을 취하는 사이, 윤씨 일행은 주변 쓰레기 수거로 분주했다. “지금까지 쓰레기를 10마대는 더 수거했습니다. 인근에 있는 굴 양식장에서 밀려온 그물 등의 쓰레기가 엄청났으니까요.” 그래선지 다시 제1암장으로 향하는 길에는 담배꽁초 하나 보이지 않았다.
제1암장 전면 코스는 밀물 때 순식간에 물이 밀려오기 때문에 확보자가 낭패를 보는 경우가 있어 주의해야할 곳이었다. 오후 들어 물이 차기 시작했지만 만조까지는 시간이 있어 이종태씨가 5.10b의 ‘바람 남자’ 등반에 나섰다. 매끈한 직벽이 5.11은 되어 보였지만 홀드가 좋아 등반의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코스였다. 작년에 등반을 시작한 그는 일 년간의 혹독한 트레이닝 덕에 수월하게 직벽을 올랐다. 이어 이준철씨도 5.10b ‘2월 29일생’ 코스 등반에 나섰다. 한동안 등반을 쉬어서 몸이 불었다는 그는 중단부의 작은 홀드에서 잠시 머뭇거렸지만 스탠스를 잘 이용해 등반을 마무리했다. 멀어졌던 비릿한 바다 냄새가 밀려왔다. 하얀 물거품을 일으키는 파도와 푸른 하늘 그리고 화강암 암벽의 조화로움을 감상하기 안성맞춤인 갯바위에 앉았다. 며칠을 두고 오르고 싶은 암장, 또 며칠을 두고 바라보고 싶은 바다였다.
윤길수씨가 비장의 카드로 남겨둔 미개척 바위로 이동했다. 제2암장 모퉁이를 돌자 높이 30미터, 깊이 7미터쯤 되는 해식동굴이 나타났다. “우와! 이거 완전 그림 같은 벽이네요.” 안으로 들어서자 공명현상이 생길 정도로 기이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이곳만 마무리하면 56개의 루트가 완성될 것 같습니다. 6월 말까지 클라이머들의 손이 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제6구역 볼팅 작업을 위해 벽으로 향하는 그의 얼굴에 흐뭇한 웃음이 번졌다.
올여름 일렁이는 파도, 작열하는 태양 아래 힘찬 오름짓을 꿈꾸는 클라이머들을 위한 해벽. 윤길수, 이종태씨가 무의도에 개척했다. 서울에서 딱 한 시간 거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