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마당/루트정보

선인봉 어센트길

팬더마당 2010. 5. 14. 22:06

○선인봉 어센트길○

 


 - 내 생활의 미래는 산과 함께 살까나

 

 

 ◇ 초등 당시의 사진 좌측이 진경용 회장이며 우측이 김인식씨다(촬영 전병구)


잊혀져 가는 것은 슬프다. 그리고 슬픔마저 묻어버리고 마는 세월은 차라리 무섭다고 해야겠다. 미래가 필요치 않은 때가 있었다. 젊음 그 자체로 부러울 것이 없었기에 끝 모르게 산에 빠져들던 시절이다. 그 열정의 시대를 버리고 우린 무엇을 얻었는지…
선인봉에 올 때면 습관적으로 우측 끝에 버티고 있는 오버행을 쳐다보곤 했었다. 그 길은 언제나 손님이 없었으므로 사람이 붙어있는 모습이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70년대에 산을 올랐던 나로서도 60년대는 물론 이미 1950년대에도 바위를 했던 선배들이 신기하기만 하다. 그땐 사는 일이 지금보다 더 만만치 않았을 터인데 바위에 빠져들었다는 것은 분명 운명적인 선택이 아닐 수 없다.

 

오늘 바로 그 오버행에 길을 낸 어센트 회원들과 함께 왔다. 생각해보면 그곳에 시선을 주던 일은 결국 기다림이 아니었는지…“쩔그럭 쩔그럭” 장비 사리는 소리가 퍼지는 하늘 사이로 희뿌옇게 보이는 햇빛이 여간 고맙지 않다. 비가 오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줄곧 들었기 때문이다. 33년전 이 길을 개척했던 진경용 회장과 남다른 애정으로 산악회를 이끌고 있는 전완근씨를 비롯해서 이정환, 하용호, 김융기, 박준순, 평촌고 산악부이자 어센트의 꿈나무가 될 서형준, 김태현, 그리고 미국 뉴저지에서 왔다는 유소년 클라이머 정현태 군도 오늘의 현장에 함께 했다. 안전벨트를 매면서 김융기씨가 옛일을 더듬는다. “야 정환아, 너 박쥐에서 떨어졌다고 몽둥이로 맞은 생각 나냐?” “난 운악산에서 아이젠으로 자일 밟았다고 20대 맞은 기억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아.”


“아! 그땐 형들이 특히 완근이 형이 정말 무서웠어.” 그 시절엔 정말 기합 줄 명분이 무지하게 많았다. 그것이 옳지 않은 일일지라도 잘못으로 인정될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을까. 여하간 지금 우린 몽둥이 세례 없는 밝은 세상(?)에 살고 있다. 그때보다 산에 가는 일이 더 행복한가는 다시 한 번 반문해야겠지만 말이다. 잼과 레이백이 혼합된 첫 마디를 박준순씨가 오르는 모습을 지켜보는 동안 선배들은 함께 오지 못한 안충근을 못내 아쉬워했다. 어젯밤 소주 한 병을 놓고 옛이야기를 나누다 새벽 2 시나 되어서 잠이 들었고 그는 이후에 도착했다. 일리터 짜리 코냑 한 병이 말끔히 비워져있었던 것은 바로 그와 박준순이 주도하여 마신 술이 분명했다. 술병이 난 톱쟁이 안충근, 그는 결국 캠프를 지켜야만 했다.

 ◇ 어센트길 개척 당시의 사진. 오버행 출발 지점이다.(촬영 전병구)


 - 교리보다 더 좋은 어센트 취지문

술자리는 좋지만 절제하며 마시는 편이어서 꽤나 몸 사린다는 핀잔을 들어온 나도 술과 함께 보낸 시간을 계산해보면 몇 년은 족히 될 것이다. 과음한 다음날 초췌한 얼굴의 친구를 바라보는 것은 조금은 통쾌하지만 그러나 남자로서 할 일은 아니다. ‘친구여 술 처먹다 우린 늙었다… 친구여 우리의 술은 너무 맑은 누군가의 목숨이었다…’ 시인 김홍성이 쓴 시를 생각하면 더불어 취하지 못한다는 것은 언제나 미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술로 인해서 등반을 같이 하지 못한 그를 안타까워하는 마음은 당연지사다. 준순씨가 40미터의 크랙을 오르는 동안에도 이야기는 끝이 나지 않는다. 과거 이야기가 많아진다는 것은 나이 먹는다는 징후일 게다.

 

그러나 즐거운 것을 누가 말릴까. 이정환씨와 진경용 회장도 첫 마디를 기다렸다는 듯 오르는 몸짓이 부담스럽지 않다. 이어서 서형준 군이 붙었다. 전완근씨가 지도하는 꿈나무다. 그는 누구보다 어센트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표범에서 떨어지고 얼음에서 떨어진 후 목발 짚고 다시 시작해서 얻은 감정, 그런 것을 아이들한테 가르쳐 주고 싶은 거지. 스쳐 지나가는 인생인데 바위는 좀처럼 변하지 않아. 안식처로 삼을만한 바위는 아이들한테 고향을 만들어 주는 작업이지.” 그는 신학을 공부하고 통신을 가르치는 선생님답게 아이들을 단단하게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산을 상대로 자신들의 정열을 불태우며…
목숨을 함께 할 수 있는 형제자매의 우정을 쌓고…


전 세계를 탐험하고 대자연의 아름다운 신비와 파노라마에 잠겨 순수한 생태계의 질서와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고자 노력하는… 어센트산악회 취지문의 한 구절이다.
아무리 좋아하는 선후배들이 만나는 모임일지라도 이 정도면 어설픈 종교 집단의 교리보다 더 훌륭해 보인다. 물론 그걸 다 지켰다간 벌써 큰일이 났겠지만 말이다. 공교롭게도 어센트에는 존경하는 선배들은 물론 안면 있는 사람들이 어느 단체보다 많다. 전병구, 전두성, 박봉래, 함탁영, 김운영, 민병국, 김명춘, 김민성, 이정열, 신동우, 신동석, 유순복, 이선화, 임종숙, 노영수, 황규화 등. 꼽아보니 이렇게 많은 회원들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나도 놀랄 뿐이다.

- 1969년 5월 어센트길 개척

어센트산악회는 1962년 전병구(한국산악회 부회장), 박행이, 이태용씨 등이 주축이 되어 탄생시켰다. 한국산악계가 알피니즘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기 시작한 때였지만 제대로 활동하기엔 경제가 너무 어려운 시절이었다. 어센트 코스는 1968년 10월 6일부터 시작하여 1969년 5월 11일까지 네 차례의 등반 끝에 만들어졌다. 1969년 루트를 개척하고 그해 8월 잡지에 보고한 내용을 보면 어센트 코스를 개척하기 위한 팀이 원정대와 같은 체제를 하고 있는 것이 흥미롭다. 전병구씨를 리더로 하여 A파티는 김인식, 박창현, 진경용, B파티는 이상직, 정하경, 김강원이었으며 각자의 직책도 명확하다. 운행은 김인식, 섭외에 엄수웅, 기록 김강원, 사진 이상직, 통신 김강원, 의료는 김기환씨가 담당했다.

 

장비는 네 동의 자일 중 80미터 한 동은 경희대에서 빌린 것이며, 31개의 카라비너 중 9개는 엠포르산악회에서 빌린 것을 특별히 명기한 것을 보면 당시의 장비가 얼마나 애지중지 되었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되도록이면 볼트를 쓰지 않으려고 노력한 흔적으로 보아 당시에도 클린 클라이밍의 사조를 수용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내 여기서 First Ascent가 되어 큰소리로 대원에게 Ascent 하고 외쳐준다…대원들과 같이 즐거움을 나누기 위하여. 여기에의 이 기쁨을 차곡차곡 쌓아서 히말라야로 향하는 하나의 밑거름을 만드리라. 이런 생각을 하며 나의 이상이 조용히 입으로 흘러나온다. 내 홀로의 한계는 지금 등정하고 있는 고난이요, 내 욕심의 확대는 제일 높은 산이라고…내 생활의 미래는 산과 함께 살까나.’

 

개척등반을 마치고 등반기의 마지막을 장식한 문장이다. 글에서도 어딘지 향수가 느껴지는 걸 보면 변하는 것은 마찬가지. 그러나 오늘날의 등반은 고난도를 향해서 달려왔지만 과정에서 얻는 성취감이나 자세는 그에 비해 진보한 게 없는 듯하다. 그 당시가 더 아름다웠다고 생각되는 것은 단지 과거이기 때문일까. 박준순은 다시 오버행을 쳐다보며 망설였다. 확보물에 대한 불안감이다. 옛날처럼 래더를 준비한 것은 아니지만 퀵드로를 이용하여 볼트 따먹기 식으로 오르면 될 것인 양 쉽게 생각했던 그는 첫번째 볼트에 닿자마자 경기를 일으킨다. “서늘하네요. 만일 추락하면 정환이 형이 잡아주겠지요?” 불안한 마음이 고조되는 대목이다. 그러나 그는 20개의 하켄과 볼트를 차례로 걸고 잡고 건너뛰기까지 아무 말도 없었다. 오직 집중이 필요할 뿐이지 어떤 말도 도움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보이냐?”  “예.”  “마지막이지.”  “예.”  마지막 턱을 넘어가며 다음에 오를 진경용 회장과 준순씨가 나눈 대화는 이 짧은 말이 전부다. 70년대 중반에 이 길을 오른 후 이제 다시 왔다고 회고하는 진경용 회장은 첫번째 출발 지점을 비교적 수월하게 넘는다. 자전거 타는 방법을 몇 십년이 지나도 잊어버리지 않는 것처럼 그는 능숙하게 올랐던 옛 기억이 살아난 게 분명하다. 그러나 낡은 슬링을 걱정하며 우측으로 횡단하기 전 잡았던 파란 슬링이 끊어지며 몸이 뒤로 출렁거렸다. 작은 추락이다. 뜨끔한 일이지만 위에서 확보를 보고 있으므로 보는 사람은 위험해 보이지 않는다. 그는 준순이가 오를 때 안 나간 것이 천만 다행이라고 나직이 말했다. 슬링을 빼내어 버리자 밑에서 기다리던 이정환씨가 걱정스런 목소리로 외친다. “자꾸 끊어놓지 마세요.” 낡은 슬링이라도 없다면 잡을게 없어서 고생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이정환씨는 산악회에 입회해서 인수봉을 처음 등반하고 그 다음에 어센트 코스를 오르다가 바닥까지 추락한 무서운 기억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그의 걱정은 그런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 둘째마디 오버행을 선등하는 박준순씨. 자연암장의 오버행은 인공 벽에 비해서 위험하다. 때문에 안전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저도 내일 모레 오십이에요”  진 회장이 끝나고 나의 차례다. 오버행 출발 지점까지 우회하지 않고 직상하면 될 것으로 생각했는데 한 동작 때문에 단번에 팔에 펌핑이 왔다.
굳이 중간 테라스까지 올라서 출발하는 이유를 알기에 충분했다. 간신히 직상 슬링을 잡았지만 한번에 꺾고 일어서기엔 힘이 부쳤다. 근력운동을 한지 오래여서 당연한 일이다. 주마를 걸어야 하는데 멍청하게도 오른쪽만 두 짝이 아닌가. 고생해도 싸지. 긴 오버행은 절대 주마링 하지 않겠다는 생각도 별 수 없었다. 먼저 오른 준순과 진회장은 모처럼 개인 하늘의 볕을 참고 한참을 더 기다려야 했다. 박준순씨가 햇빛에 노출되며 고통받는 모습이 안쓰러워 빌레이 시트를 내려주니 너무 편하다고 좋아한다.

 

미국 뉴욕으로 건너 간 신승모 선배가 70년대 쓰던 것인데 선물로 받아두고 있다가 요즘 잘 써먹는 물건이다. 마지막 차례인 이정환씨 역시 내가 고생하는 모습을 참고했겠지만 그도 매끈하게 오르기엔 부담을 느끼는 것 같았다. 추락거리를 생각한다면 우선 확보물의 보수 작업이 필수라는 생각이 등반 뒤에 모두가 느낀 점이다. “생각 같아선 잘 할 줄 알았는데 잘 안되더군요.”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당연하게 할머니 가게에 모인 후 오늘의 등반에 대해 진 회장이 던진 일성이다. 소주 두 짝을 해치운 다음날 김재근 형과 함께 등반을 했던 70년대 중반이 마지막 그의 기억이었다. 확보를 보던 소나무에서 우드득 소리가 나서 머리털이 섰던 그때의 추억은 오늘 파란 슬링이 끊어질 때의 기억으로 업데이트 된 것이다.

 

그는 아직도 80킬로그램이 넘는 벤치프레스를 들며 유도, 합기도, 검도까지 섭렵한 사람이라고 하용호씨는 귀뜸한다. 나이가 들면 떨어지는 게 근력이기도 하지만 유연성이 줄어들기 때문에 있는 힘을 다 쓰기도 전에 펌핑이 되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멋있고 회원들과 어디라도 같이 갈 수 있는 리더임이 분명하다. “야! 그런데 정환이 너 어느새 배 들어가고 몸 만들었네.”  “저도 내일 모레 나이 오십이에요.”
“내일 모레 오십이면 아직 멀었어.”  “너 그런 소리하다가는 맞아 임마.”
분명 기억이 없다고 말했던 전완근씨의 입에선 어느새 또 다시 때린다는 말이 나오고 있었다.

인자함과 미소년의 얼굴을 아직도 갖고 있는 그도 후배들을 때린 기억이 없다는 것은 거짓일 가능성이 충분해지는 순간이다. 그런데 대화에 걸맞지 않게 이정환씨에게서 뜻밖의 말이 나왔다. 어젯밤 배낭을 메고 오르다가 떠오른 생각으로 시 한편을 지었단다. 한 번 읊어보라는 모두의 주문에도 내용은 들을 수 없었지만 제목은 ‘클라이머의 꿈’이며 나는 영원한 클라이머로 남고싶다는 말을 읊조리듯 중얼댔다. 이미 가슴속에 넣어둔 것이다. 아들 이름을 설악과 한라로 지을 만큼 산 사랑에 빠졌던 그가 아직도 초발심을 깊이 간직하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90년도에 시도했던 안나푸르나 등반의 후유증에서 벗어나서 어센트의 르네상스를 꿈꾸기 시작했다는 계획은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있는 한 가능한 일로 보인다. 아직도 마음은 건드리면 터질 것 같지만 희망이 무어냐고 누가 묻는다면 대답은 점점 궁색해진다. 산에 갈 수 있는 것 자체가 삶의 이유일 수 있는 나이가 된 것이다. 그러나 산을 통해서 열정의 시대를 지나왔고 아직도 목표가 있는 삶은 괜찮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