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수봉 동양길
우리나라에는 모두 몇 개의 산이 있을까? 갑자기 이 질문을 던지면 당황해서 '100개'라던지 "1,000개 정도 되지 않을까?"라는 대답을 듣기 쉽다. 산림청이 2006년10월부터 2007년 11월까지 국토지리정보원의 자연지명 자료 등을 기초로 현장 조사 등을 해 본 결과 우리나라 산의 숫자는 모두 4,440개였다. 매일 다른 산에 다닌다고 해도 최소 12년 이상이 걸리는 셈이다.
암벽등반과 암릉등반(리지산행)을 하는 사람들 역시 이런 생각을 해봤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바위길은 도대체 몇 개나 될까? 이에 대한 공식적인 조사는 없지만 지금은 절판된 김용기의 <한국암장순례>라는 책을 보면 전국 43개산 233개 암장에 모두 2,556개에 이르는 바위길이 있다고 한다. 생각보다 훨씬 많은 숫자다.
이 많은 바위길을 역시 매일 다른 루트를 등반한다고 해도 7년의 세월이 필요하다. 그러나 암벽등반이 어디 매일 할 수 있는 것이던가? 비가와도 못하고(물론 '물바위'라고 해서 비가와도 등반을 하는 경우가 있지만 위험할 뿐 아니라 제 기량을 발휘할 수도 없다) 추워도 더워도 못한다. 무엇보다 백수가 아닌 다음에야 매일처럼 등반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우리나라 암벽등반의 메카라 할 수 있는 북한산 인수봉에는 정규루트만 약 80여개가 있고 인수봉만큼은 못되어도 거의 쌍벽을 이룰 만큼 인기 있는 도봉산 선인봉에도 40여 개가 넘는 암벽 루트가 있다. 뿐이랴 적벽, 장군봉, 무명봉으로 대표되는 설악산에는 유명한 천화대리지, 별따는 소년 리지, 한편의 시를 위한 길 리지 등 아름다운 암벽, 리지길이 많다. 그리고 수도권의 안산, 관악산, 수락산 등과 강원권의 백운산, 두타산, 청옥산, 충청권의 조령산, 계룡산, 작성산…
그 많은 바위길을 모두 가 볼 수는 없겠지만 그중에서 가장 멋지고 아름다우며 등반의 묘미를 살릴 수 있는 바위길들을 가는 것은 그러나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인수봉을 시작으로 바위길을 하나씩 찾아보려 한다.
“인수봉을 오른다”는 것은 각별한 의미가 있다. 북한산은 최근 삼각산으로 불리는데 백운대, 만경대, 인수봉이 커다란 삼각형 모양으로 놓여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그런데 세 봉우리 중에 가장 높은 것은 백운대로 해발 836미터이고 인수봉은 810미터로 백운대보다도 26미터나 낮다. 그럼에도 인수봉 등정을 더 높이 펴주는 이유는 등반이라는 형태를 하지 않으면 워킹으로 오르기는 불가능한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수봉에 처음 등반하는 것을 “머리를 올리러 간다”고도 한다.
암벽등반은, 특히 인수봉과 선인봉 등은 워킹산행과 달리 정상등반을 모두 끝마치지 못할 때가 많다. 부쩍 늘어난 등반인구 때문에 이른 아침부터 거의 모든 루트가 클라이머들로 가득 들어차 있다. 특히 주말에 여러 등산학교의 졸업등반이 있으면 피치등반은 아예 포기하고 한 피치짜리 연습바위에서 이른바 하드 프리를 하게 된다.
동양길은 까다로운 청맥길과 나란히 자리를 잡고 있는 인기코스 중 하나이다. 사실 동양길은 초급자들에게는 버거운 중급의 코스다. 최고등급이 5.10b(이하 난이도는 요세미티 십진등급체계에 따름)까지 나오기 때문이다. 인수봉에서 가장 긴 루트 중 하나이며(가장 긴 코스는 크로니길로 237미터) 8마디로 구성되어 있다. 루트 길이는 209미터.
동양길은 1969년 10월 동양산악회에서 루트를 초등해서 자연스레 동양길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흔히 말하는 동양(東洋)과 서양(西洋)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당시 초등자는 이용대 원로산악인(현재 코오롱등산학교 교장)이다. 소요시간은 중급자 2인 1조를 기준으로 약 3시간 30분이 걸리는 코스.
동양길은 크랙과 슬랩 그리고 인공등반까지 골고루 즐길 수 있는 종합선물세트와도 같은 코스다. 그래서 초급 딱지를 떼고 등반에 재미가 붙게 되면 꼭 가보고 싶어지는 코스인 것이다.
첫째 마디는 천천히 몸을 푸는 구간이다. 커다란 홀드를 잡고 올라서서 왼쪽으로 길처럼 나있는 바위를 따라 약 15미터를 이동하면 된다. 난이도 5.7. 사실상 등반의 시작은 둘째 마디로 보아야 한다. 20미터 거리에 난이도 5.10b의 슬랩이다. 초급자들은 둘째마디에서 일단 기가 좀 눌린다. 둘째 마디의 출발은 키가 큰 사람이 유리하다. 팔을 쭉 뻗으면 아주 양호한 홀드를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슬랩길을 따라 올라 가다보면 나타나는 쌍볼트가 둘째마디의 끝이며 셋째마디를 이어서 가기도 한다.
셋째마디 역시 난이도 5.10b에 20미터에 이르는 슬랩이다. 조금 미끄럽기는 해도 관록으로 밀어붙일 수 있는 코스. 여기서 어려움을 많이 느낀다면 등반을 게을리 했거나 운동부족이라고 보아야 한다. 넷째마디는 발란스를 이용한 35미터의 크랙길이다. 작은 V자 크랙을 잡고 가야하는데 무섭다고 자꾸 안으로 파고들면 등반이 되지 않는다. 다리를 바위 등으로 올리고 두발과 두 손을 교대로 사용하며 올라야 한다. 발란스 등반 경험이 적은 사람은 난이도 5.8이라도 까탈스럽다고 느낄 수도 있다.
다섯째 마디는 길이가 30미터로 슬랩과 크랙으로 구성된 길이다. 난이도가 5.8이니 무난하게 오를 수 있는 곳이다. 여기까지 오르면 드디어 왼쪽으로 만경봉이 보인다. 그러나 아직 백운대는 보이지 않는다.
여섯째 마디는 인공등반 구간이다. 경사가 직벽에 가까울 정도로 가파르기 때문에 자유등반으로는 올라가기가 힘든 곳이다. 일명 '볼트따기'라고 해서 순수한 암벽등반의 반칙이라고 볼 수 있는 볼트 밟기가 허용되는 구간이다. 다섯째 마디에서 왼쪽으로 거룡길로 빠지는 길이 있고 여기서 거룡길로 가는 사람들과 만나게 된다. 거룡길 역시 최고난이도 5.12b로서 중,상급 클라이머들의 사랑을 받는 코스다.
퀵도르를 잡고 볼트를 밟는 인공등반 구간인 여섯째 마디를 넘어서면 마지막 마디인 동양길 7피치, 5.10a의 슬랩길이며 슿햅을 오르면 인수봉 정상에 다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