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모가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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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은주 엔터테인먼트 부장
요즘 세대들에게 식모란 단어는 인형의 머리숱을 풍성하게 해주는 일(植毛)이다. 하지만 이전 세대들에게 '식모(食母)'란 어떤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남의 집에 살면서 밥을 해주는 사람. 식모는 급격한 이농(離農) 사태가 낳은 여성 잉여 노동력을 도시가 저비용으로 흡수하는 방식이었다. 웬만큼 먹고살 만한 집에선 먹여주고, 재워주고, 시집갈 때 장롱 해주는 조건으로 그녀들을 고용했다.
시인 김수영의 시 '식모'는 이렇다. '그녀는 盜癖(도벽)이 발견되었을 때 완성된다/ 그녀뿐이 아니라/ 나뿐이 아니라…우리들의 새끼들까지도…/ 그녀가 온 지/ 두달 만에 우리들은 처음으로 완성되었다/ 처음으로 처음으로.' 시인은 식모라는 타인을 의심하는 속물적 중산층의 모습을 위악적으로 그려냈다.
시인이 말했듯, 식모들은 '이방인'을 무시하거나 의심하는 주인의 눈초리와 술주정에 시달렸다. 각지에 방직공장·전자공장이 생기며 식모들은 '여공'이 됐고, 그 단어는 어느덧 '사라진 직업' 리스트에 올랐다.
올해 대중문화계에서 자주 접할 단어 중 하나가 바로 그 식모다. 화제와 논란의 시트콤 '지붕 뚫고 하이킥'에서 주인공 신세경은 전형적인 70년대식 식모다. 어린 동생을 데리고 상경한 그녀는 한 달에 60만원 받으며 식품업체 사장 집에서 먹고 잔다. 임상수 감독은 고 김기영 감독의 영화 '하녀'를 전도연 주연으로 다시 만들어 상반기 중 개봉한다.
1960년 개봉한 영화 '하녀'는 중산층의 허위의식과 파멸을 낱낱이 그려냈다는 점에서 영화사에 길이 남을 수작이다. 영화에서 식모, 혹은 하녀는 피아노 강사가 가장인 한 중산층 가정을 완전히 박살내고 만다. 이 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2층집을 올리는 것이었다. 그 사이 하녀는 자신의 노동력과 관능을 무기로 부엌을 장악하고, 침실까지 침투한다. 부엌과 남편을 빼앗긴 아내는 그래도 2층집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린다. 악몽의 완성이다.
'식모'란 말이 사라진 지 수십년, 영화 '하녀'가 개봉된 지 50년 만에 왜 이 낯선 단어가 다시 나오기 시작했을까.
시트콤 '지붕 뚫고 하이킥'을 잠깐 보자. 이 집은 3대가 아침마다 식사를 함께 하지만, 그저 모여 살 뿐이다. 이 집에서 극심한 외로움에 떠는 초등생 딸, 부모와 동거인처럼 지내는 고교생 아들에게 눈물과 사랑을 알게 해 주는 존재는 '식모'뿐이다.
어느새 우리 중산층의 가정에서 '밥 해주는 사람'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제 능력 있다 평가받는 주부들은 더 이상 밥을 하지 않는다. 그 시간에 더 좋은 학원과 강사의 정보를 수집하고, 적시에 인터넷으로 매매 주문을 넣고, 괜찮은 부동산을 현지답사하는 주부가 대접받는 세상이다. 가정의 구성원은 맛집을 순례하는 '식객(食客)'이 되고, 가정은 원활한 부동산 투자를 위해 똘똘 뭉치는 '투자 공동체'이거나, 좋은 대학을 위해 돌진하는 '교육 공동체'가 되어 버렸다.
이런 고기능의 시대에 주부들에게 '이제 가정으로 돌아가 밥을 준비할 시간'이라는 얘기를 하는 건, 적절치도 않고 실효성도 없다. 하지만 말이다, 가정이 '밥 공동체'가 아닌 '투기 공동체' '사교육 공동체'가 되고, 그걸 차선이라 믿어 버리는 게 우리가 꿈꾸던 '선진국' 삶일까.
식모 이야기가 많아지는 게 주부들더러 식모가 되어달라는 얘기는 아니다. 그보다는 '밥벌이'에서 '밥'보다 '벌이'에만 방점이 찍힌 우리의 삶의 풍경에 '밥'이 주가 되는 풍경을 그리워하는 심리가 더 크다. 그저 그리운 것이다. 말 그대로 밥 주는 사람, 식모(食母)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