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설악 등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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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선대로 오르는 흘림골 계곡을 걷는 발걸음은 비록 급한 오르막이지만 가볍다. 지도로 보아 짤막하고 단순한 길이기 때문이다. 도상거리로는 1km, 실거리는 아무리 길게 보아도 1.5km에 불과하다. 그리 오래지 않아 절경을 본다는 기대감으로 매표소 앞을 지났다.
매표소 안으로 들어 잠시 오르자 순식간에 원시 풍광으로 변한다. 오래도록 풍상을 겪으며 속이 썩어들어 거의 껍질만 남은 고령의 주목들이 여기저기 패찰을 달고 섰으며, 나이테를 보니 300~400년은 묵었음직한 거대한 전나무가 쓰러져 푸른 이끼로 뒤덮여가고 있다. 계곡은 작지만 품어 안은 것은 풍부하다.
등선대 코스는 실은 오색 주민들 민심 달래기 차원에서 개방한 코스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오색 주민들은 오색약수 분출량이 거의 정지되는 한편 금강산으로 관심들이 쏠리며 관광객 숫자가 크게 줄어들자 국립공원관리공단에 생계보장 차원에서 등선대 코스를 개방해달라고 줄기차게 요구해왔다. 오색 주민들이 이렇게, 분명 많은 관광객들이 몰려들 것이라 자신하고 있었을 만큼 이곳 등선대 풍치는 특상급이다.
다리로 다시 왼쪽 사면으로 건너서는 급비탈을 오르면 오른쪽 협곡 저 안 깊숙한 곳에 한 줄기 가는 물줄기가 벽을 건드리고 있는 여심폭포가 뵌다. 한자 표기가 ‘女心’ 아닌 ‘女深’인, 은근히 외설적인 이름이다. 몰려온 단체 등산객들 중의 리더격인 남자들은 어김없이 한 마디씩 야한 농담을 꺼내든다.
여심폭포 앞에 있는 아름도 넘는 흰 줄기의 나무는 희귀목인 엄나무다. 개두릅이라 부르는 엄나무 순을 따기 위해 이렇게 큰 엄나무도 사정없이 베어 넘어뜨렸던 예가 많다. 이곳은 많은 관광객이 수시로 드나들며 감시자 역할을 할 것이니 이 엄나무는 오래도록 살아남을 것이다. 요란스런 여심폭포 앞을 떠나 등선대로 향했다. 물줄기는 끊어졌고 비탈도 심해진다 싶더니 평평한 안부 위다. 여기서 왼쪽 위의 등선대까지 올랐다가 되내려와 남쪽 12폭포로 하산하는 것이 거의 정석으로 굳어졌다. 거꾸로 산행해서 안 될 것 없지만 다리 힘이 갑절로 들 것이다. 작은 공터를 이룬 안부에 올랐다. ‘여심폭포 0.3km, 등선폭 0.4km, 등선대 0.4km’ 팻말이 서 있는 삼거리다. 등선대쪽으로는 사람들이 쉴새없이 오가고 있다. 그들을 따라갔다. 등선대 벽과 그 앞에 문설주처럼 선 기암 사이로 백두대간 주능선쪽 풍경이 들어앉는다. 길이 좁아서 툭하면 윗사람이 내려오기를 기다려야 했다. 등선대 기슭으로 다가서자 가파른 바위벽에 밧줄이 매어져 있다. 잡고 오르려는 이와 내려오려는 사람들이 줄을 지어 기다리고 있다. 사다리를 놓던지 무슨 수를 쓰지 않으면 단풍철엔 ‘교통대란’이 일어날 것 같다. 바위를 오르는 일에 서툰 사람은 등선대 정수리로 올라서기도 또한 쉽지 않다. 때문에 아낙들은 태반이 포기하고는 되돌아서고 만다. 만약 등선대에 올라서 보았다면 안간힘을 써서라도 올라오길 정말 잘했다며 가슴을 끌어안게 될 것이다. 금강산 천선대도 저리 가라
설악산 대청봉에 올랐다가 중청 지나 희운각쪽으로 내려가다가 소청봉에 서면 저 아래로 펼쳐진 공룡릉과 용아릉 기암봉들에 혼이 앗기고 만다. 이곳 등선대는 그들 용아릉이나 공룡릉의 기암봉 무리를 새가 되어 바로 위에 다가가 바라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천화대 암릉을 해본 바위꾼들 이외는, 아마도 설악에서 이런 기막힌 조망점을 본 사람이 없을 것이다.
치솟고 패이고 휘거나 겹친 그 기이한 암봉들의 면면이며 숫자를 어떻게 헤아려 전할 수 있을까. 이곳의 풍광이야말로 백문이 불여일견, 직접 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금강산 천선대 풍경도 이곳 남설악 점봉산 등선대에는 댈 것이 못된다는 이재영씨의 자랑이다.
금강산 천선대 주변은 날카로운 침봉들이 수백 개 총총히 몰려서 있는 기관이 자랑인데, 너무 침봉들뿐이라 좀 단조롭다. 그에 반해 이곳 등선대에서는 대청봉이며 점봉산의 부드러운 육산 능선과 우뚝한 기암봉들이 황금분할로 어울렸다. 게다가 오늘은 뭉게구름까지도 양념으로 곁들여져 오래도록 등선대 정상을 떠나지 못하게 한다. 여기서 보니 귀청봉은 정말 무슨 짐승 귀처럼 뾰족하게 솟았다. 대청봉에서 귀청봉에 이르기까지 설악산 서북릉이 전혀 다른 산인 듯 새삼스럽다. 구름이 지나며 서늘한 그늘이 서북릉 산록에 드리워지곤 한다.
이곳에서 뵈는 기암봉들은 밑둥과 몸통, 머리통까지의 굵기가 별 차이가 없어, 거대한 신전 기둥 같다. 저기 내?외설악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이곳 남설악만의 기관이다. 정수리로 몇 마리 까마귀가 날아오르고 잿빛 안개로 밑둥을 가린 침봉들은 짐짓 신화적 분위기마저 띤다.
고갯마루에서 계단길을 내려오자 이내 주전골 12폭포다. 과거엔 이곳 12폭포까지만 왔다가 되돌아 내려가야 했는데, 이제는 길이 통한 것이다. 긴 암반을 희뿌옇게 물보라를 일으키며 흘러내리는 와폭인 12폭포 바로 옆을 따라 내려가면 널찍한 웅덩이 같은 암반 가운데에 옥색 물이 고인 옥녀탕이다. 몇 번 보는 풍경이지만, 아름답다. 주변 산록에 단풍이 물들면 물론 기막힌 절경이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