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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인봉 연대배첼러길

팬더마당 2010. 5. 14. 22:05

○선인봉 연대배첼러길○

 

 


- 지금도 오버행 너머에서 손짓하는 그리운 배첼러들

 ◇ 세째마디의 크랙을 통과하고 있는 정호진씨.


“저 길로 가는 사람들은 뭐지?” “응! 저쪽은 진짜배기들이 가는 데야!”
석굴암을 우회하던 등산객은 선인봉으로 가는 우리들을 가리키며 그렇게 말했다.
뒤통수에 작은 경련이 이는 듯했다. 비꼬는 것이 아니라면 쑥스러워 할 일이다. 어쩌면 그 진짜에 근접하는 삶의 실마리가 저곳에 있을 거라는 막연함이 오늘날까지 이곳에 오게 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 이놈들 산에 가자고 하면 볼 수도 없는데 말이야. 시내에서 술 먹자고 하면 열다섯명 씩이나 나오는 거야!” “봉섭이 형을 따라 갔었는데. 야, 다음 주는 배첼러길을 가니까 술 끊고 담배 피지 말고 금욕생활 할 것. 선배들이 낸 길이니까 경건한 마음으로 오라는 뜻이었을 텐데 발가락이 무척 아팠던 기억이 나요.”


대학연맹 동기들과 어울렸던 정호진씨의 지난 주와 25년도 더 지났을 박환선씨의 과거가 오버랩되는 순간이다. 배첼러의 첫 마디도 채 오르기 전에 비바람에 쫓겨 내려와야 했던 지난주와는 달리 오늘은 새벽부터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굵은 비가 내렸지만 기어코 햇살이 비치기 시작했다. 연속 3주 동안 비 때문에 등반을 중단했던 정성을 이제야 하늘이 알아차린 것이다. “손재식씨, 오늘 촬영을 위해서 내가 무엇을 도와줄까?” “정말요? 그렇다면 나를 운반해주면 제일 좋긴 한데.” “앗! 그건…내가 괜한 말을 꺼냈군.” 호의를 보이는 정호진씨의 따뜻한 배려가 농담처럼 들려왔다. 그의 말투는 언제나 유머가 배어있다. 머리 나쁜 사람은 그 진의를 엄숙하게 받아들이고 조금 좋은 사람은 두 번쯤의 대화에서 알아차린다.


연대배첼러길의 첫 마디는 조금 애매하다. 일반적인 루트처럼 바위 밑둥에서 길이 시작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C코스로 불리는 터널에서 왼쪽으로 이어지는 나무 사이로 비스듬히 전진한 후 대여섯이 설 수 있는 불규칙한 테라스에서 출발하게 된다. 야영을 들어왔던 재학생 팀은 벌써 첫마디를 저 만큼 앞서 나가기 시작한다. 어젯밤엔 틀림없이 정신없이 마셨을 텐데. 최재석, 권석홍, 현창길에 이어 홍일점인 김미연은 오늘도 선배들의 틈에 씩씩하게 끼어있다. 얼핏 표정이 없어 보이지만 이미 바위에 푹 빠져있는 것이 틀림없다. OB의 골수들인 류중희 회장과 임공택 총무 그리고 정호진씨와 나는 둘씩 짝을 짓기로 했다.

- 고 김종철 이만수씨 등이 68년에 개척

일전을 불사할 태도로 손에 테이프를 감고 임공택씨가 먼저 선등으로 오른다. 체구에 비해서 몸이 상당히 두꺼운 그는 어디에 붙어도 끝까지 오를 수 있을 만큼 단단해 보였다. 류중희씨는 요즘 몸을 만들기에 한창이다. 김동현이 주인인 크림프에서 운동을 하는 그는 힘을 기르기보다 러닝으로 몸을 가볍게 하는 것이 효과적일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현명한 판단이다.
첫 마디의 크랙에 손을 넣고 비트는 순간 아차 싶었다. 아직 물기가 그득했으므로 평소처럼 적은 힘으로는 미끄러움을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크랙 외에 별 다른 홀드가 없는 곳은 그저 푹푹 쑤셔 대는 것이 최고다. 그러나 그 때문에 바위면에 너무 찰싹 붙으면 갈수록 힘은 더 들기 마련이다. 크랙이 끝났을 때 나의 손은 어느새 복숭아 껍질 벗기듯이 까져나가고 있었다. 이들이 테이핑 할 때 나는 무얼 했던가.


휙 지나간다고 표현하면 좋을 만큼 가볍게 오른 정호진씨가 첫째 마디의 마지막에서 바로 둘째 마디의 슬랩과 크랙을 선등으로 나간다. 그가 오른쪽 나무를 가리켰다. 1973년도에 이곳을 보수할 때 천막을 치던 곳이란다. 정자를 지어도 좋을 만큼 넓고 반반한 터를 마치 집안의 마당처럼 자랑한다. 그곳엔 틀림없이 ‘소주병 너트’와 ‘오징어 프렌드’를 공수한 요원들의 별 같이 많은 이야기가 묻혀 있을 것이 틀림없으리라. 보수작업이라는 것은 크랙에 흙을 제거하고 루트를 명확히 하는 일이다. 그런데 이곳을 깔끔하게 이어보려는 시도는 1978년 박환선씨의 볼트 작업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는 박내혁과 함께 여름방학이 끝난 후 4개의 볼트를 설치하고 보수 작업을 완료했다. 입대하기 전에 무언가 남겨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군입대가 어떤 일의 분수령이 되는 것은 이정범씨의 경우에서도 마찬가지다.


“68년도에 개척이 끝났어. 걔네들이 69년도에 죽었거든.” 이정범씨는 그들과 함께 등반하다가 군에 입대했으므로 그 시기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가 결코 기억에서 지울 수 없는 ‘걔네들’은 김종철과 이만수 그리고 오준보씨를 가리킨다. 그들은 1969년도에 한국산악회 해외원정 훈련대에 참가했다가 설악산 죽음의 계곡에서 눈사태로 사라진 인물들이다.
만일 이들이 살아남았다면 산악사의 일부는 새로 써야 했을지도 모른다. 오준보, 김종철, 이만수 이 세 사람은 연세대 산악회 선후배일 뿐만 아니라 훈련대에서도 같은 파티였다.

 ◇ 정호진씨와 류중희씨가 넷째마디의 슬랩을 등반하는 임공택씨의 등반을 확보하고 있다.


- ‘독립채산제’로 등반하는 연세산악회

훈련대원들은 종로 낙원동의 조양여관에서 10여 일을 합숙하며 등반준비를 했다.
1969년 2월 3일 설악산으로 떠나기 하루 전, 대원들이 흰눈 내리는 무교동 밤거리의 외출에서 돌아왔을 때 구슬픈 노래가 기타 반주와 함께 들려왔다. 이만수와 김종철이 부르는 노래였다.

엄마엄마 나죽거든 설악산에 묻어주
앞산에다 묻지말고 설악산에 묻어주
비가오면 덮어주고 눈이 오면 쓸어주
친구들이 찾아오면 산에 갔다 전해주

노랫말처럼 그들은 설악산에서 그렇게 사라져갔다. 사망 당시 22세의 나이였다. 이들이 얼마나 서정과 감성이 넘치는 젊음이었다는 사실은 부연할 필요가 없다. 죽는 순간까지 그들은 산과 같은 삶을 살았다.

산에서 살면서 산처럼 살자고
우리들 모여 모두 여기 왔네
그리운 계곡 그리운 산정
정든 이 산정에 우리 또 왔네
산새들 노래도 우리를 반기고
계곡에 울려 퍼진 요들소리
그리운 계곡 그리운 산정
정든 이 산정에 우리 또 왔네

오준보씨 역시 마지막 설중(雪中)일기에 이 산노래를 남겨 놓고 25세로 세상을 마감했다.
이들의 행동으로 보아 “김문식, 남궁탁, 이만수 그런 애들이 노래도 잘했어”라고 땅과 대화하듯 속삭이는 이정범씨의 말은 전혀 과장이 없어 보인다. 우리들이 입을 모아 부르던 대표적인 산노래 ‘저 높은 산’이 바로 이만수씨의 자작곡이며 배첼러라는 이름도 그에게서 나왔다. 독신자나 총각이라는 원래의 뜻에서 느껴지는 청정한 의미보다는 그들은 한마디로 잘 노는 산꾼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 고 이만수씨가 배첼러로 명명

배첼러길 탄생의 주역이었던 고 김종철씨는 어느 날 누워서 망원경을 이리저리 돌려보다가 B코스와 C코스 상단에 아래위가 끊어진 리스를 발견했다. 그 리스를 연결한다면 훌륭한 루트가 될 것임을 예견하고 지금의 연세산악회 지도교수인 정연규씨를 만나 자세한 의논을 하였다. 그리하여 김종철, 이만수, 정연규, 이정범은 선인봉에 새 길을 내기로 결정하고 선배들에게는 약간의 경제적인 협조를 얻기로 하였다. 10개의 카라비너와 약간의 앵글을 빌리고 볼트는 직접 제작했다. 3박 4일 동안 하루에 두 명씩 교체해가며 등반을 계획했다.

 

1968년 5월 31일에서 6월 6일까지 기술된 김종철씨의 개척기에 오준보씨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 걸로 보아 선배였던 그는 다른 형태로 대원들을 돕지 않았나 싶다. 연세산악회의 현재 고참인 천호선씨나 김정섭, 심재일, 한이석, 손성락, 정인성씨등의 선배들도 이 네 명의 회원들과는 활동했던 시기가 달랐던 것이다. 1968년 12월 16일 정연규씨는 학교 도서관에서 우연히 김종철씨를 만났다. 그리고 시험이 끝나는 날 개척코스를 정리하고 암벽에 박아 놓은 하켄을 회수하기로 약속한다. 12월 18일 아침 날씨는 맑았고 지난 날 내린 눈으로 처마 끝에서는 물방울이 똑똑 떨어지고 있었다.

 

테라스에 도착하니 시간은 오후 2시. 6시간의 등반과 작업 끝에 리스에 박아 놓은 하켄을 회수하고 슬랩 끝의 직벽을 넘어선 시간은 밤 8시였다. 주위는 완전히 캄캄해졌으나 전면 버트레스를 끝마쳤다는 기쁨이 벅차 올랐다.이들은 두손을 모아잡고 ‘배첼러 하이!’ 하고 외쳤다. 그것은 김종철씨의 마지막 암벽 등반이었다. 결국 이들의 거사는 30년도 훨씬 지난 오늘 우리가 그 이름을 불러야할 만큼 거룩한 일이 되고 만 것이다. 인수봉이 남성적이고 선인봉이 여성에 비유될 때 당시의 연세대의 배첼러들이 선인봉에 바윗길을 낸 것은 잘 맞는 궁합인 듯 싶다.

 

바위에서 재학생과 OB들은 모르는 사이처럼 지내는 것이 연세산악회의 분위기로 느껴진다. 등반에서 이들은 독립채산제였다. 땀 흘리고 절제한 만큼 가볍게 오르고, 먹고 마신 만큼 고통스럽게 오른다고 할까. 수익자 부담의 원칙을 어려움을 겪는데 잘 적용시키는 듯했다. 재학생들은 산전수전 겪은 선배들보다 몸놀림이 매끄럽지 않지만 도움을 받아 오를 만큼 약하지 않으며 깡이 살아있기 때문에 섣불리 누가 우세하다고 말할 수 없다. 다만 등반이 끝난 후에 후배들은 더 없이 고분고분해야 한다. 그래야 하산주 값을 지불하는 선배들의 주머니를 2차, 3차까지 털어 내는데 무리가 없기 때문이다.

- 뭇 사람의 심금을 울린 김혜경씨

현창길이 셋째마디의 고빗사위인 작은 수직 크랙에서 머뭇거리자 원래 그곳은 인공등반 구간이었다며 확보물을 설치하라는 임공택씨의 지령이 전달된다. 그가 작은 프렌드를 설치하고 그곳을 넘은 후에 재차 선등을 하는 공택씨는 정호진씨의 확인하에 선택한 너트를 박으며 그곳을 돌파했다. 독립채산제에서 다시 그룹으로 이어지는 순간이다. 만일 연세산악회가 기업을 했다면 언론사를 만들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지금은 고인이 된 월간 산의 박광성씨 이외에도 박인식, 안중국, 김승진 부장처럼 기라성 같은 사람들이 바로 연대 산악부 출신이다. “형! 중간에 볼트 박은 지가 언제예요?”


둘째 마디의 볼트는 언제 설치되었냐는 질문에 류 회장은 때마침 휴대폰이 연결된 박환선씨에게 즉시 사실을 확인한다. 세상이 좋아졌다기보다 지독하게 가까워졌다고 해야겠다. 그는 이미 바로 밑에 와있었다. “이 슬랩이 옛날에는 공포의 대상이었는데 지금은 왜 이렇게 울퉁불퉁해졌는지 모르겠어.” 깔깔함이 살아있는 다섯째 마디의 슬랩을 가리키며 정호진씨는 그렇게 옛날을 반추한다. 군용워커를 신고 등반한 경험이 있는 그는 설사 선배들이 길을 잘못 가도 이리로 가세요 또는 저리로 가세요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저기 저 오버행이 말이야 인식이 형이 쓴 책의 무대가 된 곳이지.” 마지막 다섯째 마디의 수직 벽을 넘어가는 재학생들을 보며 연세산악회에서 빼놓을 수 없는 박인식씨의 이야기를 들추어낸다.

 

내친 김에 과거 그의 글에 등장하여 뭇 사람의 심금을 울렸던 김혜경은 어떤 사람이었나를 물었다. “아! 혜경이 누나. 나보단 일년 위였는데 작고 야무져 보이는 그런 사람이었어. 매력 있는… 그 누나가 설악산에서 죽고 난 뒤에 남몰래 슬퍼한 사람들이 많았을 거야.” 그 말이 끝나자 오버행 너머는 어느새 드라마의 무대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 무대 위엔 박환선씨가 먼저 올라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먼저 오른 재학생들도 이제 OB들을 아는 체 한다. 각자 살기로 한 계약이 끝난 셈이다. 하산주가 기다리는 마무리는 언제나 등반보다 어렵고 심오하다. 무지하게 맛있다는 삼겹살과 소주가 오늘 무대에 선 사람들을 움직였는지 남모르게 장학금을 많이 받았다는 사실을 하나 둘씩 털어놓는다. 놀라운 일이지만 결코 장학금을 받아본 적이 없는 정호진씨는 이 대목에서 자랑할 게 없다.

 

만일 ‘이제는 말할 수 있다’는 프로에 출연한다면 나도 자백할 게 있다고 웃음을 지어 보이는 류 회장은 그 돈으로 대부분 장비를 구입했다고 실토한다. “그래 장학금의 장자는 장비할 때 장자지.” 이들이 받았다는 장학금은 전두환 장학금이니 알프스 장학금이니 하는 괴상한 것들이긴 하지만 무언가 잘했다고 받은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누구에게 자랑도 하기 전에 산에 바친 것이 오늘날까지 벗어날 수 없는 굴레가 된 것이니 누구를 탓하랴. 이제는 이 일을 그만 두어도 결코 세상은 아무 변화도 없다. 그러나 우린 이런 쓰잘데없어 보이는 짓을 멈추지 못하는 사실이 통쾌하다. 그리하여 아직까지도 꾼들은 노래한다.
아자자자자자자자자. 아! 나는 그때 바위하러 가았다…

 ◇ 연대 배첼러길 루트도


- 연대배첼러길 등반 길잡이

연대배첼러길은 1953년 창립된 연세대학교 산악부의 고 김종철, 고 이만수, 정연규, 이정범씨에 의해서 1968년에 완성한 200여 미터에 달하는 길이다. 선인봉 전면의 좌측 편에 있으며 전체적으로 슬랩과 크랙으로 이루어져 있다. 손가락과 주먹이 들어갈 정도의 크랙이 끝나면 슬랩이 연결되는 길이 반복되며 경사가 급한 곳은 인공으로 오르는 곳이다.
출발점까지의 접근은 선인봉 밑에 있는 석굴암의 오른쪽 옆으로 올라 C코스의 동굴 같은 터널 아래의 편평한 곳에서 시작한다. 이곳에서 벨트를 차고 왼쪽의 계단처럼 느껴지는 바위와 나무를 잡고 10여 미터쯤 오르면 나무들이 있는 테라스가 나온다.
등반은 이곳에서 시작된다. 테라스에서 바로 직상하는 길은 배첼러길이 아니며 왼쪽 아래로 석굴암의 지붕이 보이는 경사가 급한 바위턱을 딛고 일어서면서 왼쪽 방향의 슬랩으로 첫 마디가 시작된다.

◆ 첫마디(40m)
바위턱을 딛고 왼쪽 슬랩으로 넘어간 다음 상단으로 연결된 볼트를 이용하여 오른다. 볼트가 끝나는 곳에서 계속 왼쪽으로 이동하면 크랙이 시작된다. 양손으로 재밍을 하고 발을 크랙에 끼우고 오르면 된다.

◆ 둘째마디(42m)
원래 디에드르 상의 크랙 선을 따라 직상하는 길이 개척 당시의 길이었는데 박환선씨와 박내혁씨가 1978년도에 왼쪽 사선 방향으로 4개의 볼트를 박아서 길을 연결시켜 놓았다. 볼트 길을 지나면 다시 직상 크랙이 이어진다.

◆ 셋째마디(50m)
역시 계속 왼편으로 이어지는 페이스의 풋 홀드를 손으로 잡고 밟으며 오르다가 경사가 급한 크랙과 레이백 자세의 우향 크랙을 따라 오른다. 수직으로 느껴지는 구멍 홀드를 넘어가는 고빗사위는 5.11a/A1의 그레이드가 매겨진 곳이지만 볼트와 확보물의 사용 여부에 따라서 달라진다.

◆ 넷째마디(27m)
왼편 상단으로 홀드가 이어지는 슬랩을 따라 오르다가 삼각형 모양의 약간 비스듬한 테라스의 왼편 턱을 넘어서 슬랩으로 오르게 된다. 자일의 길이와 유통을 고려한다면 삼각테라스에서 짧게 마디를 끊은 다음에 다시 슬랩을 올라도 좋다.

◆ 다섯째마디(35m)
전체적으로는 경사가 심한 슬랩을 직상하게 되지만 움푹 패인 곳이 많아 고도감을 타지 않는 사람은 어렵지 않게 오를 수 있다.
슬랩이 끝나면 다시 직상 크랙을 볼트와 프렌드를 사용하여 넘어가게 된다. 루트의 상단에는 완경사의 쌍볼트에서 등반을 종료할 수 있다. 선인봉 정상으로 오르려면 계속하여 우측 상단으로 나가서 등반을 마치고 걸어서 간다. 하강은 북쪽 방향의 만장봉을 바라보며 왼편의 나무에 자일을 걸고 5∼6미터쯤 하강하여 조금 내려간 후 다시 왼쪽으로 짧은 하강을 한다. 그 이후엔 걸어서 길과 마주치게 된다.

● 등반장비와 소요시간
자일은 50미터나 60미터 자일을 쓰는 것이 좋다.
프렌드 한 조와 퀵드로 10여 개 정도가 필요하고 셋째마디의 직벽의 구멍 크랙을 넘을 때는 작은 호수의 너트를 하나 설치하면 유용하다. 등반 시간은 두 사람이 한 조일 경우 두 시간 이상 잡는 것이 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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