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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인봉 표범길

팬더마당 2010. 5. 14. 22:13

○도봉산 선인봉 표범길○

 

 

 

 
  - 큰 바위 얼굴로 남은 젊은 날의 우정

 ◇ 셋째 마디 슬랩을 오르는 강구영씨의 등반을 지켜보는 백인섭씨.

외곬수.’ 선인봉 앞에서 이 단어를 되뇌어야 한다면 요델클럽을 한번쯤 생각지 않을 수 없다.
누구보다 선인봉에 깊이 빠져 살았지만 기억하기도 어려울 만큼 오랜 동안 그 품을 떠나 살았던 사람들. 그들이 다시 돌아오고 있다. 선인봉은 사람을 집요하게 하는 마력이 있다.


인수봉이 우리의 가슴을 한없이 뛰게 했다면, 선인봉은 미치도록 그 곳에 빠져들게 했다.
많은 산 친구들이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가는 동안에도 요델 식구들은 선인봉의 마력에서 헤어날 수 없었다. 그들은 점점 외곬수가 되어갔으나 그게 바로 운명이라면 운명이었다.
세월은 흘러 시간의 힘에 의해 마력이 풀리게 되자 요델 식구들은 소리 없이 선인봉을 떠나갔다.


그리고 아주 오랜 동안 잠을 자기 시작했다. 바람 불고 낙엽 지는 계절이 수십 번 지나는 동안에도 잠은 깨지 않았다. 얼마가 지났을까. 이들이 문득 일어났을 땐 세상이 변하도록 잠든 사실조차 잊고 있었다.
어느날 과거의 사실을 기억해 냈을 땐 이미 흰머리 흩날리는 모습이 되어 있을 뿐이었다.
선인봉과 요델의 관계는 끝난 것일까. 천만에! 그것은 성서의 예시대로 교제가 끊긴 것일 뿐 관계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청춘을 온전히 받아주던 바위는 그 자리에 의연하게 있었다.
요델의 전사들은 해묵은 장비를 들고 다시 선인봉으로 갔다.
요델이 선인봉의 맹주가 되도록 한 장본인 백인섭도 여느 때와 다른 마음가짐으로 그 앞에 섰다.
40년이란 세월이 소리 없이 그 앞으로 흘러갔다.

- 다시 울려 퍼진 요델의 목소리

표범길에 요델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 것은 정말 오랜만의 일이었다.
약속이나 한 듯 요델 식구들은 또다시 예의 그 일을 시작했다.
첫째 마디의 몸짓을 기억해 용감하게 앞서 나가는 도종득씨. 그리고 그에 이어 줄을 함께 묶은 회원들이 스스로 말한다. “어! 쉽지 않네.”


선인봉에 숱한 길을 만들었어도 떨어져 본 기억이 흔치 않은 백인섭씨도 표범길이 예전보다 어려워졌음을 실감한다. 하켄에 의지하여 넘던 곳이니 첫 마디부터 미끄러지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추락에 주눅 들지 않을 만큼 마음은 그대로이건만 몸이 그만큼 변한 것뿐이다.
도종득과 김영욱이 루트를 돌파해 가는 동안 백인섭, 강구영, 이건영, 신흥수, 나경봉, 김한경씨 등이 차례로 등반을 시작했다.


요델에 괴짜들이 많다고 하지만 그런 것 말고도 남다른 점 하나를 발견한다.
오늘 참가자들 모두가 50세를 넘겼으며 그 나이면 워킹하면서 막걸리나 마셔도 좋을 법한 일이지만, 다시 또 바위에 오를 수 있다는 것은 분명 평범한 일이 아니다.
유효 기간이 오늘 뿐이라 해도 그건 분명 다른 점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또 다른 가능성 하나를 잉태하는 일이었다.


1963년 5월에 창립을 본 요델의 창작 활동은 이듬해부터 시작되었다.
1964년 양지길 개척을 신호로 1965년 허리길, 1966년 표범길, 1967년 설악산 범봉과 석주길, 1968년 칠형제봉, 1968년 만장봉 그림길, 측면Y길, 1969년 범봉 연봉, 1971년 요델 버트레스, 1972년 동계 용아장성, 1973년 선인봉 막내길, 1974년 설악산 흑범길, 1975년 염라길 등.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70년대 중반까지 한국의 주요한 바윗길들이 요델의 손에 의해 그려졌다.


시대가 만들어준 성과라 하기엔 너무나 많은 열정과 땀이 그 속에 녹아들어갔다.
60년대 초까지 선인봉엔 전면 A,B,C와 박쥐길 그리고 남면과 측면에 각기 하나씩 루트가 있었다.
6개의 루트만 존재하던 당시엔 바위를 하는 자체가 특별한 일이었고 바윗길을 개척하는 것은 물론 선구적인 일이었다. 백인섭씨는 허리길을 개척한 다음 해인 1966년경부터 표범길을 주목했다.
그리고 연결 되지 않은 선을 줄곧 관찰했다.


1966년 5월 22일. 그 불연속선을 잇기 위한 작업이 시작되었다.
모든 일은 불확실했고 어떻게 올라야 하는지 해답은 없었다.
1피치 상단에서 진자횡단으로 테라스로 연결하는 일 그리고 언더크랙을 지나 변형 침니에서의 동작전환 등 막연하지만 허리길 개척 당시 만났던 기적 같은 바위구멍처럼 스탠스와 홀드들이 그 곳에도 있을 것 같았다.


백인섭과 강길건, 이희구, 조상규 등이 먼저 개척의 첫발을 뗐다.
두 동의 로프와 하켄 17개, 볼트 5개, 카라비너 10개, 사다리 6개를 갖고 출발점에 섰는데 우연치 않게 작은 사건이 발생했다. 하켄을 박기 위해 첫 해머를 치는 순간 자루가 부러져 나갔다.
불안했지만 그러나 이것은 나쁘지 않은 징조였다.


만일 바위 중간에서 이런 상황이 벌어졌다면 얼마나 낭패스러운 일인가. 첫번째 난관을 돌파하고 4m 위의 나무가 있는 턱에 올라섰다. 거기서 위로 쭉 뻗은 크랙은 레이백이 가능한 멋진 선이지만 흙이 꽉 차 있어 손톱으로 후벼 파면서 오를 수밖에 없었다. 크랙이 끝날 때는 손톱에서 피가 흘렀고 아파서 더 이상 오를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하켄을 설치하고 조심스럽게 후퇴했다.


다음 주말 이희구씨의 선등으로 다시 그곳까지 갔다.
지난주에 오른 곳에서 윗부분의 크랙이 까다로워 앵글하켄을 쳐야 했다.
그러나 크랙이 막혀 끝만 살짝 박을 수밖에 없었다.
그 뒤로 오르던 백인섭씨가 미끄러지면서 하켄이 빠졌고 허벅지가 바위에 부딪쳤다.


다행히 큰 부상은 없었다.
하지만 그런 끝에 1피치에 튼튼한 확보하켄을 설치하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 큰 수확은 석양빛에 빛을 발하는 보석 같은 스탠스의 발견이었다.
그것은 1피치와 2피치를 연결하는 절대적인 끈이었다.

 ◇ 김영욱씨가 셋째 마디 상단부에서 조심스럽게 무게 중심을 옮기고 있다.

- 개척 2년만인 1967년 5월 완료

1966년 5월 29일, 백인섭, 강길건, 정지혜 등이 다시 등반을 시도했다.
1피치 상단에 박은 하켄에 줄을 걸고 진자운동을 시도한 끝에 비로소 2피치 시작 지점의 바위턱을 잡을 수 있었다. 그 곳에는 예상대로 레이백이 가능한 크랙이 형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처음 부분은 손가락조차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좁았다. 앵글하켄 한 개를 박고 몸을 허공에 노출시키며 레이백으로 오르다가 변형 침니로 자세를 바꾸어 스탠스 위에 올라섰다.


그곳에는 하켄을 박을 수 있는 크랙이 이상적인 각도로 형성되어 있었다.
뚜껑 덮인 바위 속에 돌출된 크랙은 3~4cm만 안쪽에 있어도 해머질이 불가능했다.
해머가 위턱에 걸리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마치 도봉산 산신령이 딱 필요한 만큼만 쓸 수 있도록 밖으로 뽑아 놓은 것 같았다. 그 하켄은 표범길을 완성시키는데 아주 중요한 실마리였고 어떠한 추락도 안전하게 잡아 줄 확보점이었다.


언더홀드는 예상대로 아주 양호한 형태였다.
하지만 몇 스텝을 오르자 다시 난관에 부딪혔다.
주걱처럼 불거진 부분이 너무나 얇고 바위가 삭아서 흔들거렸다.
잡으면 떨어져 나갈 듯 바위가 불안했다.
여기에 한두 개의 확보지점을 더 마련해야 하는데 유일한 대안은 대형 봉봉하켄이었다.


당시 고대산악부OB인 장영환씨가 대형 두랄루민 봉봉하켄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고 서울공대산악부 홍종만씨를 통해 그것을 빌릴 수 있었다.
7월 3일, 홍종만, 오준보와 함께 등반을 시작했다.
신기하게도 불연속선이 끝나는 지점에는 항상 어떤 형태로든 돌파구가 마련되어 있었다.
문제의 언더홀드를 돌파하는 데는 봉봉하켄이 바로 해결책이었다.


3피치는 예상보다 양호한 상태였다.
굴곡이 적당하고 크랙은 훌륭할 정도로 형성되어 있었다.
크랙이 끝나는 지점에 볼트를 설치하기 위해서 앵글하켄을 박았다.
크랙이 막혀 반도 들어가지 않았지만 불안한대로 균형을 유지하면서 볼트작업을 시작했다.
그런데 20여분 동안 구멍을 뚫었을 때 사다리를 건 앵글하켄이 밑으로 쑥 밀리는 것을 느꼈다.
놀란 나머지 얼른 드릴부터 뽑았다.


드릴을 떨어뜨릴 경우를 대비해서 손가락에 줄을 매고 작업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드릴과 해머를 색에 넣는 순간 하켄이 쑥 빠지면서 슬립을 시작했다.
그의 몸은 순식간에 미끄러져 10m 아래 있던 세컨드인 송종만의 옆을 지나갔다.
“앙카”하고 내지르는 비명에 놀라 황급히 줄을 잡았지만 제동이 될 리 없었다.
한참을 더 떨어지다가 움푹 파인 바위 속에서 덜컥 멎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아무런 사고가 없었다.
결국 그 곳을 다시 올랐고 볼트작업을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마지막 볼트에서 10시 방향으로 이어지는 구간은 크랙이 없는 깨끗한 페이스였다.
그러나 등반은 역시 쉽지 않았다.
페이스의 등반 가능성 판단은 겨울로 미루게 되었다.
눈이 바위에 붙어 있다면 완만한 경사이며 사람이 설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해 겨울 어느 날, 바라던 상태의 눈이 내렸고 전면 샘터에서 그 부분을 살폈다.
사면에는 하얀 눈이 발자국처럼 쌓였고 전체적으로 급사면이지만 가능성은 확인되었다.
그리고 1966년이 흘러갔다. 이듬해인 1967년 5월, 다시 등반이 시작되었다.
지금껏 절묘한 해결책이 등장되어 루트를 이어간 것에 비해 나머지는 그리 어려운 작업이 아니었다.
겨울에 확인한 대로 마지막 슬랩은 돌파되었고. 개척을 시작한 지 1년 만에 허리길로 연결된 4피치 크랙 구간을 이어 드디어 표범길이 완성되었다.


그런데 그 무렵, 예기치 못한 사건이 하나 발생했다.
ROTC로 전방에 근무하던 조상규씨가 돌연 세상을 떠난 것이다.
조상규는 백인섭의 악우이자 요델의 전성기를 만든 장본인이었다.
그의 별명은 ‘표범’이었다.
그리하며 2년의 각고 끝에 선인봉 왼쪽에 그어진 그 길은 조상규를 영원히 기억하기 위해 ‘표범길’이라 명명되었다.

 ◇ 개척 2년만인 1967년 5월 완성된 표범길 전경.

- 고 조상규씨 별명 따 ‘표범길’로 명명

노출된 인수봉과 숨겨진 곳이 많은 선인봉의 형태를 두고 흔히들 남성과 여성성에 비유한다.
페이스가 많은 인수봉은 밸런스, 크랙이 발달한 선인봉은 힘이 필요하다는 말도 거기서 생겨났다.
하지만 현대등반은 그런 형태적 기준을 이미 뛰어넘는다.
바위로 접근하는 시간은 짧게 난이도는 어렵게 등반 루트도 변하고 있다.
원 피치 루트와 볼더링이 거기에 부합한다.


그러나 이런 흐름 속에서도 아직껏 한국적 알피니즘의 근거지가 되어 온 인수봉과 선인봉의 존재 가치는 여전히 유효하다. “어떤 것이든 그것을 진정으로 원하고 최선의 노력을 하면 모자라는 것은 하늘이 도와 그것을 얻게 된다." 백인섭씨가 20대의 젊음을 선인봉에 바치며 바윗길을 개척하는 동안 깨우친 사실이다. 사람의 힘으론 불가능하여 산신령이 점지해 주었다고 믿던 그 경이로운 홀드와 스탠스처럼.


“요델은 기인들의 집합이었어.”
술잔을 기울이며 하던 말대로 표범길은 애초부터 기인이 아니면 만날 수 없는 길이었는지 모르겠다.
지천명을 넘긴 나이에도 다시 바위에 오를 수 있는 행위의 근거는 결국 젊음과 동료에 대한 그리움이 아닌가 싶다. 믿음을 버리지 않는 한, 그리고 산으로 향한 걸음을 멈추지 않는 한, 선인봉은 늘 변치 않는 큰 바위 얼굴로 존재할 것이며 젊은 날의 우정이 다시 그 앞에 다시 펼쳐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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