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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수봉 인수A길

팬더마당 2010. 5. 12. 20:26

북한산 인수봉 A코스
70년 전에 피어난 한줄기 바윗길
글·사진 손재식 사진작가 sohnbal@orgio.net



 ◇ 정은순씨가 인수봉 A코스의 상징인 넓은 침니 구간을 오르고 있다.


소중하게 여기던 물건들을 버려야 할 때가 있었다.
온 국민이 허리띠를 졸라매도 해결책이 보이지 않던 IMF 때의 일이다.
그때 정든 장비와 오래 보관해온 산서의 대부분을 과감히 정리했다.
시원섭섭한 일이었지만 그런 가운데 <향토송>이라는 이름의 사진집 한 권이 버려지지 않고 아직 내 서가에 꽂혀 있다.
파리의 뒷골목을 집요하게 기록한 프랑스의 사진가 유젠느 아트제는 죽은 뒤에서야 비로소 빛을 보게 된 불운한 사진가였다.
그의 사진이 현대적 관점에서 연구가치가 있는 것도 뒤늦게 인식되었다.
쓸쓸한 일이다.
사라져간 풍물을 기록한 사진집 <향토송> 역시 그처럼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다시 눈에 띄었다.
작가는 이미 세상을 떠난 후였다.
그 책을 지금껏 간직한 것은 눈 내린 날 전차가 있는 남대문 풍경과 달구지가 지나가는 아스라한 여의도의 옛 정경들이 거기에 담겨져 있어서였을까. 아니다.
이 책을 버리지 못한 것은 북한산이 담긴 옛 사진 한 장 때문인 듯싶다.
논길 사이를 걸어가는 아이들 뒤로 소담스러운 초가집이 옹기종기 있고, 원경에는 북한산 주릉과 인수봉이 펼쳐져 있다.
원로산악인들이 즐겨 불렀던 ‘개나리 고개’가 잘 어울릴 법한 그 사진 끝엔 도봉 창동이란 설명이 붙어있다.

개나리 고개는 눈물의 고개
올라갔다 내려올 제 님의 집 생각
달빛을 받으며 님 마중 가세
님 오신단 그 심사에 꺾던 개나리
개나리 고개에 걸린 저 달은
님 오시는 오솔길을 밝혀줄거나
개나리 고개야 너 잘 있거라
이제 가면 언제 오나 개나리 고개
에헤야 개나리
아무렴 그렇지 개나리
지금은 어디서 개나리 생각하나

 ◇ 잡목지대 이후 크랙과 침니가 시작되는 셋째 마디.


1936년 박순만씨 일행 초등정

산에 가는 일이 나라 잃은 서러움을 달래는 행위가 되었을 시절, 선구적 산악인 김정태는 스무 살 나이에 인수봉 정상에 올랐다.
지금으로부터 70년 전인 1935년, 일제강점기였으니 그게 어디 쉬운 일이었겠는가. ‘빼앗긴 들’이었지만 ‘봄’은 아직도 산에 머물러 있었음을 김정태는 몸을 던져 알아냈다.
그리고 그 봄을 지켜내기 위해 일본인들보다 먼저 인수봉을 오를 생각을 했다.
김정태는 엄흥섭과 그를 따르던 김금봉과 일본인 이시이를 데리고 그때까지 아무도 성공한 적이 없는 인수봉 정면벽을 올라 신기록을 우리에게 남겨 주었다.
인수봉에 B코스란 이름의 루트가 처음으로 열린 것이다.
인수봉의 초등반은 1929년에 이미 영국인 공사 아처 일행이 북면을 통해 한 바 있다.
그 이전에 우리의 선조들이 먼저 올랐을 것이 분명하지만 남겨진 기록상 그렇다.
그러나 이후 6년 뒤에 행해진 김정태의 정면벽 등반은 비로소 인수봉에 등정주의가 아닌 등로주의 등반이 꽃핀 것으로 볼 수 있다.
그것은 에드워드 윔퍼의 마터호른 등정 이후 슈미트 형제가 마터호른 북벽을 오른 것에 비견될 수 있다.
만일 그가 아니었다면 한국 바위의 자존심 인수봉은 일본인들에 의해서 난도질당했을 것이 뻔하다.
그래서 크랙과 침니마다 그들의 이름이 붙여졌다면 어떠했을까. 선배들 ‘시다바리’하다가 ‘야마’가 ‘입빠이’ 돌아서 ‘무대뽀’로 ‘노가다’ 길을 올라갔다는 식의 일본식 루트 이름을 지금껏 부르고 있지 않겠는가.
김정태가 인수봉과 선인봉을 오르던 시절, 바위에서 늘 만나던 일행들이 있었다.
암벽에 붙어 있는 것이 마치 망망대해에 떠 있는 조각배와 같았을 그때, 세 번씩이나 마주친 그들은 바로 서울 근교에서 두각을 나타내던 한국인 박순만과 일본인 오우우치·오바·하마노 일행이었다.
한일 혼성으로 이루어진 등반 팀은 언제나 김정태를 앞서 가고 있었다.
이들에 의해 대슬랩이 처음 등반 되었고 인수봉의 A코스가 비로소 열렸다.
박순만과 오우우치 일행은 1936년 여름 인수봉 후면 C코스를 등반하고 이해문(지금의 백운산장 주인 이영구씨의 조부)씨가 거처하는 백운암으로 내려왔다.
그곳에서 인수봉 정면이 찍힌 사진을 보고 그날 밤 마음속으로 등반 계획을 세웠다.
그 뒤 시내 다방에서 몇 차례 모임을 가진 뒤 등반 루트를 결정했고 10월에 등반에 착수했다.
매주 토요일마다 이해문씨의 방에 거처하며 등반을 시도하다가 넷째 주에는 침니가 끝나는 곳까지 오를 수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다섯 번째 주가 되는 11월에 마지막 침니와 직상 크랙을 돌파하며 인수봉 A코스 초등반에 성공했다.
두터운 등산화에 징을 박아 만든 신발을 신고 공포의 대슬랩을 돌파하였기에 이룰 수 있는 일이었다.
1913년생인 박순만은 인수봉에 올라 A라는 알파벳 이름을 부여했으며 현재까지 생존해 있는 유일한 한국 사람이다.
그는 후일 김정태와 함께 1937년 한인들만의 순수한 뜻을 지닌 ‘백령회’라는 이름 하에 함께 활동하게 된다.
일제 치하였으므로 백령회의 활동은 비밀결사처럼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엄흥섭·김정태·양두철·주형렬·엄흥섭(동명이인)·이억윤·이원세·위형순 등이 창설 멤버였으며 방현·김정호·박순만·채숙·이재수·유재선·방봉덕·현기창·조동창·이기만 등이 2차로 참여하게 되었다.
여기에 당시 고교생이었던 엄익환·이희성·안종남 등도 백령회의 활동에 가세하였다.
1940년 가을, 무려 60명이나 되는 백령회원들이 인수봉 정상에서 만남을 가진 기록은 지금 생각해도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잠재력을 지닌 백령회원들은 해방이 되자 곧바로 한국산악회 창립에 앞장섰고 국토를 구명하는 사업을 먼저 벌였다.
나라를 잃은데 대한 반작용이었다 해도 좋을 것이었다.
백령회는 산뿐만 아니라 한국 스키의 역사도 만들었다.
당시 적설량이 풍부하고 사면이 넓은 천혜의 스키장들은 대부분 모두 함경도 지방에 있었다.
해방 전의 스키 인구는 원산에 4천여 명, 함흥과 흥남지역에 2천여 명, 성진에는 4백여 명이 있었다고 한다.
1940년 이후 스키는 쇠퇴하였지만 그런 와중에도 백령회의 김정태·박순만·주형렬·방봉덕 등은 1943년 일본으로 스키 연수를 떠났다.
엄흥섭이 사재를 털어 보냈던 것이다.
이때 김정태는 스키지도자 연수회에 참가하여 일본스키연맹의 2급 지도자 자격을 획득했고, 박순만은 크리스챠니아(Christiania) 회전기술을 구사하여 지도원을 놀라게 했다.
엄흥섭은 당시 해주에서 석탄공장을 경영하고 있었다.
그는 군수품 공장 사원이 징용을 면할 수 있었던 점을 이용하여 백령회 회원들을 일제의 강제징용에서 피하게 해주었다.
당시 물심양면으로 산악인들을 후원했던 그는 해방을 맞이하기 직전 와병으로 타계하고 말았다.

 ◇ 대슬랩을 올라 ‘오아시스’라 불리는 잡목지대에 모인 취재팀. 왼쪽부터 정은순·배현기·김동수·성영식·한문수·조규진씨.


세월 흘러도 변치 않는 인수봉의 의미

그 누가 ‘당신은 산악인인가?’라는 질문을 한다면 어떻게 증거를 댈 것인가. 자격증 혹은 산악인증? 차림새만으로도 알피니스트를 알아낼 수 있는 알프스라면 몰라도 약수터와 산을 동일시할 수 있는 환경에서 산악인 행세를 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그런 물음에 인수봉에 올라 보았는가라는 되물음을 던질 수 있다.
산악인에게 인수봉은 구차한 답이 필요치 않을 정도로 전능한 의미 코드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김정태가 B코스를 오르고 박순만이 A코스를 초등한 이후 아직 변치 않았다고 믿는다.
산악인들의 등반 능력이 좋아져서 난이도를 올리기 어렵다거나 인수봉이 만만하게 보여지는 것과는 별도의 문제다.
한국산악회의 일로 백령회 회원이었었던 박순만을 인터뷰를 했던 1990년대 초, 사이클을 즐겨 탄다는 그의 말을 듣고 적지 않게 놀랐다.
그 후 1996년에 인수봉을 함께 오르고 싶다는 청을 했을 때 거동이 힘들다는 소식을 들었으니 그의 나이 93세인 지금 산에 오르는 일은 무리한 일인 듯싶다.
그러나 70년 전에 인수봉에 올랐던 그의 기억을 우리는 유추해 낼 수 있다.
오늘 그 선구자들이 만든 길을 찾은 동지들은 대학산악연맹의 산사진 소모임. 등반과 사진이란 두 마리 토끼를 좇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왜 산악인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인수봉을 통해 얻은 사람들이다.
저마다 카메라를 메고 나타난 순례자들은 등반장비를 착용하자마자 찍는 팀과 찍히는 팀으로 구분된다.
찍히는 팀은 정은순(천안공대)·김동수(외국어대)·한문수(단국대), 찍는 팀은 배현기(서울공대)·성영식(경기대)씨. 모두가 다 OB회원들이다.
초기엔 가장 큰 공포의 대상이었던 대슬랩을 평지 걷듯 올라 오아시스라 부르는 잡목지대까지 두 팀 모두 순식간에 도착한다.
박순만씨가 보았다면 깜작 놀랄 일이다.
뒷모습만 봐도 예쁜 여학생들을 만나자 김동수씨가 육포에 박하사탕을 나누어준다.
장난기 충만한 정은순이 미소를 흘리며 후배들을 챙긴다.
“이리 와서 먹어라. 사탕도 있고 오렌지껍데기도 있고. 배고프면 물배 채우라고.”
“영길 너무 어려워요. 어떻게 올라가요?”
“잘….”
“만일 못 올라가면 줄 좀 내려줘요.”
“그래, 내가 구조대 아이가.”
찍히는 팀은 크랙과 침니를, 찍는 팀은 변형 길로 업무가 시작되었다.
선등을 자처하는 정은순이 산을 업은 듯한 자세로 크랙과 좁은 침니를 지나자 찍히는 팀의 배현기도 변형 루트를 통해 마디를 끝낸다.
성영식의 셔터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추억 반 고통 반에 잠겨있을 김동수와 한문수씨가 뒤를 이어 넓은 침니로 접어들자 재학생 영길 등반팀이 저 아래로 보인다.
크레타나 군화, 혹은 정글화를 신었던 사람들은 A코스의 바위에 등을 대고 하늘을 향해 움쩍거리던 자세를 기억할 것이다.
발로 차고 손으로 몸을 밀어 올려서 굴뚝 위로 쑥 빠져나왔을 때의 시원함.확인한 바에 따르면 이전 선배들의 등반 동작은 한결같이 정확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오를 수가 없었다.
지금의 등반 동작은 대부분 팔 힘과 마찰력 좋은 신발의 의존도가 크다.
정확한 자세가 아니더라도 그것으로 충분히 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능력에 따라 오르는 방법이 달라진 지금 “어떻게 올라가요?”라는 후배들의 질문에 “잘”이라는 대답은 그래서 틀리지 않다.
오아시스 아래로 보이는 숲이 바람에 일어나 대화하고 부대끼는 동안 김동수와 정은순은 여전히 시지프스의 몸짓으로 하늘 없는 공간과 측정할 수 없는 시간을 밀어내고 있었다.
“우다다닥.”바위에 장비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영길을 오르던 저 아래 여학생들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 틀림없다.
마지막 짧은 레이백 크랙을 넘어가는 정은순 뒤로 칭찬은 아닌 소리가 들려온다.
레이백 크랙을 힘차게 뜯는 것 같지만 그것은 순전히 다리가 짧은 탓이라나?
“야! 우리 1,2학년 땐 여기 올라가기도 만만치 않았어.”
“이거 꼭 크랙으로 가야 해요?”
“오늘은 ‘에프엠’이야.”
숲은 여전히 살아 움직이고 푸르른 녹음은 불어오는 바람에 회색빛 색조로 일렁인다.
추억의 바윗길 A코스는 이제 정상으로 가는 크랙을 넘지 않아도 되고 등반 루트로 하강해도 되는 편한 길로 바뀌어 가고 있다.
어려움은 커진 반면 위험은 줄었다.
그럼에도 사고가 많아진 것은 등반을 경시하는 풍조, 그리고 횟수와 관계있을 것이다.
박순만이 이곳을 처음 오르던 당시 너무 기분이 좋아 만세를 불렀다는 느낌은 아니더라도 즐겁게 오른 일행들은 회심의 미소가 가득하다.
두 마리 토끼를 결국 잡고야 만 것일까.

 ◇ 인수봉 A코스


INFORMATION

인수봉 A코스 등반가이드

인수봉 A코스는 1936년 11월 박순만과 일본인 오우우치·오바·하마노 일행이 초등한 인수봉 동면의 대표적인 기존 루트다.
등반은 대슬랩에서 시작해 일명 ‘오아시스’로 통하는 잡목지대 위로 뻗은 크랙과 침니로 진입한다.
80m의 대슬랩과 100m에 달하는 네 마디의 크랙과 침니를 끝내면 벙어리 크랙을 거쳐 인수봉 정상으로 오를 수 있지만 지금은 편의상 크랙과 침니로 이루어진 상부의 네마디를 등반 루트로 친다.
등반 난이도는 다섯째 마디 침니 구간이 5.8로 평가되어 있다.
침니와 크랙이 끝나면 등반 루트로 하강이 가능하다.

첫째 마디(30m·대슬랩)
대슬랩 왼편에서 중앙으로 진입하여 디에드르를 지나 밴드와 혹점이 있는 슬랩을 통해 대형 피톤으로 오른다.
이곳은 일명 대슬랩 일번 루트로 통하는 곳으로 인수봉의 바닥에서 40m 슬랩을 거친 후 등반을 시작하기도 한다.

둘째 마디(50m·대슬랩)
홀드가 많고 경사가 완만한 슬랩을 직상하여 오른쪽 상단부의 잡목지대로 오른다.

셋째 마디(30m)
경사가 완만한 넓은 크랙으로 진입하여 상단부의 좁은 침니를 거쳐 테라스로 오른다.
크랙과 침니 부분은 신발과 몸의 마찰을 이용한 스태밍 자세로도 오를 수 있다.

넷째 마디(20m)
좁은 침니를 올라 테라스에서 확보한다.

다섯째 마디(25m)
넒은 침니를 올라 테라스에서 확보한다.
바깥쪽으로 몸을 돌려 오를 수도 있고 바위 쪽을 바라보며 자세를 유지한 채로 오를 수도 있다.

여섯째 마디(30m)
짧은 슬랩과 디에드르 상의 레이백 크랙을 넘어 언더 크랙을 지난다.
왼쪽 벽에 박힌 쌍볼트에서 확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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